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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사발을 보면서

문경사투리 2008. 6. 5. 23:42

 

 

문경시 흥덕동 창신아파트 103-106

이민숙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찻사발이 몇 개 있다. 언제 사용할지 알지도 못하는 찻사발이다. 너무 비싸고, 소중한 추억이 묻어 있는 찻사발이다. 거실 진열장에서 옷도 벗지 않고 사시장철 앉아있는 찻사발이다.

 

전통찻사발의 소중한 가치가 새삼스러워지기 시작한 10여 년 이래 주변에 전통차를 배우고, 이를 즐기는 붐이 일어나 많은 친구들이 이 길로 들어서는 걸 보았다. 그러나 나는 이를 부러워하면서도 차니, 찻사발이니, 도자기니 하는 것을 접해보지 못했다. 그러니 아직 전통 차를 탈 줄도 모르고, 분간할 줄도 모르고, 종류도 모른다. 찻사발도, 도자기도 그렇다. 여유가 없이 살아온 것이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사실 50이 되도록 여유 없는 삶을 살아왔다. 철모르고 결혼한 20대에는 아이들 낳고 키우면서 여유가 없었다. 30대에는 사업하는 남편 따라 거기에 골몰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40대에는 그 사업의 잘못으로 이를 수습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날 50대인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꿈 많던 소녀시절부터 그렇게도 그려왔던 내 삶의 무지개는 피워보지도 못하고, 어느새 저만치 황혼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었다.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함이 그 순간 나를 흔들었다. 우울하기도 하고, 가소롭기도 한 세상이 또한 나를 우울하고 가소롭게도 했다. 조소와 비아냥거림이 나와 세상 사이를 오고 갔고, 멸시와 배신이 나와 이웃들 사이에서 오고 갔다. 산전수전 다 겪어야 비로소 세상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거라던 어머님의 말씀. 그 말씀이 나와 세상, 나와 이웃 사이에서 버텨있지 않았다면 그 순간 나는 심한 정신적 공황에서 헤어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그 때 나는 거의 아무 의식 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고, 아무 의식 없이 말했으며, 아무 의식 없이 돌아다녔다. 술이 술을 마셨고, 말이 말을 낳았고, 돌아다님이 돌아다님을 재촉했다. 집은 단지 내 육신을 눕히는 한 도구에 불과했다. 술과 말과 돌아다님에 지쳐 들어오면 단지 잠만 자는 곳에 불과했다.

 

그런 어느 날. 뜻밖에도 나는 값비싼 전통찻사발을 만났다. 내 삶의 편린들 속에 언제나 반성과 회한의 도구였던 어머니. 그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내 일기장. 그 속에 있는 이야기 소재가 어느 날 백일장의 제목으로 나왔고, 이를 기억해 낸 글이 뜻밖에도 장원을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찻사발은 그 상품이었다.

 

그 후 나는 완전히 내 소녀시절로 돌아가게 되었다. 소녀는 술을 먹지 않았다. 소녀는 세상의 말들을 하지 않았다. 소녀는 집을 나가지 않았다. 집, 가정의 소중한 가치를 새삼 알았다. 꿈은 그 속에 있다는 것도 알았다. 무엇이나 마음속에 있었다. 부귀와 영화도 마음속에 있었다. 행복도 그랬다. 세상은 그대로 어수선한데, 나는 평화로웠다. 여유로웠다.

 

몇 해 동안 상으로 타온 찻사발들과 이젠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새로워졌다. 찻사발축제장에서 내가 받은 상품과 비슷한 찻사발을 만났다. 내 진열장에서는 그렇게 빛나 보이지 않던 찻사발이 그곳에서는 나처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장인의 투박한 손길에 패인 찻사발의 주름이 내 이마의 주름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찻사발 속에 깃든 장인의 숨결이 내 은은한 마음의 여유와 더불어 교감하고 있음을 느꼈다. 찻사발을 붙들고 무언가 표현해 보려는 질긴 장인의 정신이 내 몸 속에서도 이글거리고 있음을 알았다. 흙과 물과 불과 유약의 조화에 완전히 혼연일체가 되는 찻사발의 그 뜨거운 모습이 내 몸에 전율을 일으켰다.

 

그렇다. 찻사발은 나였다. 온갖 풍상이 혼연히 녹아 있는 찻사발은 50의 나였다. 1300도의 불길 속에서 물과 흙과 유약이 제 모습을 지워버리듯, 그리하여 마침내 새롭게 탄생하는 찻사발이듯, 나도 이젠 설익은 내 삶의 온갖 행적을 불살라 농익혀야겠다. 이젠 진열해 놓고 바라만 보던 찻사발에 차 한 잔 녹여 마시는 내가 되어야겠다.

 

찻사발을 보면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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