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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넝쿨

문경사투리 2008. 9. 22. 01:29

호박넝쿨

 

문경서중학교 2학년 2반

고유진

 

우리 집은 열 두 가구가 사는 공동주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은 특이하다. 공동주택 주변이 우리 텃밭으로 둘러싸여 있다. 본래 우리 터에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집은 늘 텃밭을 가꾸는 할머니 때문에 계절에 맞는 푸성귀며, 곡식들을 맛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올해는 텃밭에서 나오는 것들을 제대로 접하지 못했다. 할머니가 편찮기 때문이다. 여름이면 상추, 배추 등 여러 가지 나물로 식탁이 그득했는데, 지난여름에는 그 나물들을 먹어보지 못했다. 보기에는 작고 꼬들꼬들해 보이는 상추와 배추들이었지만 그 맛은 고소하고, 쌉쌀해서 보기 좋은 마트의 나물 맛과는 비교할 수 없었던 그 맛. 그리고 할머니가 담근 고추장, 된장, 또 할머니가 농사지은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로 버무린 쌈장에 쌈을 싸먹던 그 맛. 지난여름에는 그 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 풀벌레가 밤을 지새우고, 따사로운 햇살이 설핏 들판에 노는 가을. 밭둑 곳곳에 들국화까지 피어나는 지금쯤. 할머니의 가을걷이는 이른 아침부터 바쁘고 부산했는데, 지금은 집안이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 지난봄만 해도 할머니가 이런저런 씨앗들을 뿌려 텃밭에는 그 곡식들이 알알이 영글어 가고 있는데, 텃밭도 집안도 조용하다.

 

할머니의 성화는 대단했었다. 텃밭에서 일을 하다가 힘에 부치면 나를 불러 이것 좀 가져가라. 저것 좀 가져와라. 퍽이나 짜증나게 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할머니의 성화를 못 이겨 할머니가 거둔 들깨, 콩, 고구마 따위들을 초등학교 때부터 집안으로 많이 날라 오기도 했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아무래도 치매 증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도 기억력이 좋고, 사리에 밝았었는데, 이제는 자꾸 엉뚱한 말씀들을 자주 하신다. 기력도 많이 떨어져 밥도 그 전같이 못 드시고, 거의 누워 지내다시피 하신다. 내가 학원 갔다가 늦게 온다고, 기다리지 말라고 아침에 말씀드리고 왔는데도 그저께는 밤 10시까지 나를 찾아 헤맸다. 차라리 나에게 일을 시키는 것보다도 더 짜증나는 병을 앓고 계신다.

 

우리 3남매 중에서도 막내인 나를 그렇게도 끔찍이 여겨주시고, 그래서 나는 할머니에게 얼마 전까지도 품에 안겨 잤는데, 이제는 그런 할머니가 아니라, 나보다도 더 어린 아이처럼 되어 버렸다. 우리 3남매를 엄마 대신 키워 내시고, 많은 농사까지 혼자 지으신 할머니. 아빠는 그런 할머니를 우리 집에서 제일 장정이라고 말씀하시며 껄껄 웃으셨는데, 할머니가 어째서 이런 아픔을 가지게 되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추석을 지난 텃밭에 가을이 무르익는 오늘. 할머니는 오랜만에 그 전처럼 부산하게 텃밭을 드나드셨다. 콩을 꺾어 오시면서 우리 유진이 잘 먹는 콩이라고, 그래서 이 콩을 까서 밥에 쪄 줄 것이라고 했다. 호박도 열 덩이 이상을 따오셨다. 다 익어 누런 호박들은 내 머리통만한 것, 아빠 머리만한 것 등 모양도 가지가지 크기도 가지가지였다. 테레비에서 그러는데 이 호박은 시주를 내 먹으면 건강에 그렇게도 좋다고 한다고 말씀하시며 들여 놓으셨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 주변에는 온통 호박넝쿨이었다. 그리고 그 넝쿨마다 할머니의 손자들 같은 호박들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가을 햇살 아래 점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호박들이 마치 우리가 커 오는 모습 같았다. 그에 비해 넝쿨들은 누렇게 시들어 가고 있었다. 따가운 가을바람에 하루하루 야위어 가고 있었다. 호박을 튼튼히 키워내고 자신은 그렇게 말라서 시들어 가고 있었다.

 

이 가을, 호박넝쿨은 할머니처럼 자신을 태워 겨울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