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라는 돌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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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중요한 비밀을 다루는 정보국 사람처럼 보인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만 몰래 무언가를 긁적인다. 이들은 외상(外傷)이 없기 때문에 멀쩡해 보이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반쯤은 얼이 빠진 상태다. 그러나 크게 염려할 것은 없다. 이 돌림병은 새해가 되면 감쪽같이 사라진다. 큰 후유증이 없는 아름다운 병이다. 이 병은 다른 나라에는 없다고 한다.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제도가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20대 전반을 시립도서관에 처박혀 꾸역꾸역 무언가를 읽고 쓰며 지낸 한 청년도 어쩌다가 그만 이 돌림병에 걸렸다. 쇼펜하우어는 철학을 "교수의 봉급으로는 턱없이 많은 비용이 드는 부자들의 스포츠"라고 했다. 어떤 사람에겐 시(詩)도 그 비슷한 것으로 비친다. 가난한 청년이 '부자들의 스포츠'에 빠진다면 비웃을 것이다. 청년의 친척들은 그를 제 분수도 모르는 건달쯤으로 여겼다. 그들에게 시는 건강한 정신을 좀먹는 악덕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꿋꿋하게 시를 썼다. 신춘문예 공고가 나면 시를 원고지에 베끼고 만에 하나 배달사고를 우려해서 스스로 우체부가 되어 신문사에 배달했다. 신춘문예의 관문을 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여러 번 떨어졌다. 낙방은 쓰디쓴 실패를 견디는 법을, 농사를 짓듯 다시 시의 씨앗을 뿌리고 기다리는 법을, 희망 없이 한 살씩 나이를 먹는 법을 가르친다.
시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고, 우주의 비밀을 새긴 로제타석이다. 시는 끊임없이 움트고 줄기를 키우고 열매를 맺고, 다시 씨앗들을 뿌린다. 시는 아직 성장판이 닫히지 않은 어린아이다. 그것은 자라나는 것이므로 많은 자양분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냉담과 열정, 피와 담배 연기, 알코올과 책들, 바람과 서리, 대낮과 쾌락들, 건강과 폐허, 그늘과 관습에 대한 반역들, 그리고 식어 버린 커피잔과 종이들…. 시는 그 자양분을 충분히 빨아들이고도 배고프다고 헐떡거리며 더 많은 불행과 불면의 밤들과 피를 요구한다. 시는 악덕 고리대금업자가 가난한 자의 고혈(膏血)을 빨듯 한다. "시여, 나는 네게 더 이상 바칠 게 없단다. 나는 지쳤다, 그러니 이제 내게서 떠나라"고 할 무렵, 시는 겨우 제 그림자 한쪽을 떼어준다.
스무 살 무렵에 나는 시가 어렵다는 걸 몰랐다. 그랬으니 어리석게도 그것을 시작한 것이다. 시는 어렵다. 시를 안다는 건 곧 우주를 아는 것이다. 그러니 시는 삶이라는 유산에서 나오는 금리로는 얻을 수 없다. 시는 한 줄의 영감(靈感)을 위해 그 유산의 전부를 요구한다. 시는 재능만이 아니라 한 사람이 가진 것의 전체, 기회들과 열정과 목숨을 요구한다. 그 모든 걸 바쳤다고 해도 얻는 건 없다.
몇 편의 보잘것없는 시들, 그리고 시를 썼다는, 쓰고야 말았다는 일말의 자부심, 보상 없는 기쁨에 제 모든 것을 바쳤다는 숭고한 무상감(無常感) 따위가 전부다. 그래도 백석과 윤동주와 기형도를 꿈꾸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샤를 보들레르와 아르투르 랭보를 꿈꾸는 청년들은 이 하염없는 기획에 저를 바친다. 시는 순결한 자의 모험이며 기획이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결코 누구나 하지 못한다. 신춘문예는 식은 잿더미 속에서 홀연 날아오르는 피닉스와 같은 삶을 꿈꾸는 자들에게 열려 있는 문이다. 오늘 그 문을 향해 달려오는 자들의 그 무지몽매한 순결함을 내가 한없이 부러워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