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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자태실, 한개마을, 회연서원 등 비교문화탐방

문경사투리 2008. 12. 6. 15:54

세종대왕자태실, 한개마을, 회연서원 등

비교문화탐방

문경문화가족 성주군 방문

 

 

 

 

문경문화원(원장 채대진) 문화가족 60명은 12월 3일 성주문화원(원장 배춘식) 초청으로 세종대왕자태실, 한개마을, 회연서원 등 문화유적을 탐방하기 위해 성산가야의 고장 성주군을 방문하고, 문경지방과 다른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성주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였다.

세종대왕태실은 월항면 선석산 아래 태봉 정상에 있으며, 세종의 적서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두었다.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태봉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 이장경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그의 묘를 옮기고 태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한편 1977년 태실에 대한 보수시 분청인화문대접·뚜껑, 평저호 및 지석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세종은 여섯 왕비에 18왕자 4공주를 두었다.

 

 

 

회연서원은 수륜면 신정리에 있으며, 한강 정구(鄭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조선 인조 5년(1627)에 제자들이 세운 회연초당이 있던 자리에 짓고 회연서원이라 이름 하였다. 그 후 숙종 16년(1690)에 임금으로부터 ‘회연(檜淵)’이라는 이름과 토지·노비를 하사 받았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서원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서원중의 하나로 선생의 문집판 『심경발휘』가 보관되어 있고 현판은 한석봉이 쓴 것이다. 대경재·명의재·양현청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양현청은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고, 해마다 2차례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한개마을은 대항면 월항리에 있으며, 성산이씨가 대대로 살아온 전형적인 동성촌락이다. 조선세종때에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처음 이 곳에 이주하여 마을을 만들었다. 현재는 월봉 이정현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한옥 보존 마을이다. 마을 북쪽으로는 영취산(331.7m)이 좌청룡 우백호로 뻗어 있고, 서남쪽으로 백천이 흐르고 있어 영남 제일의 길지를 이루고 있다. 또한 구한말 성리학자 이진상을 비롯, 응와 이원조 등 예로부터 이름난 선비를 많이 배출 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마을 내의 주택들은 문화재자료 제354호 ‘극와고택’ 등 지방지정문화재 9동을 중심으로 전통한옥 구조가 잘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