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리(坪溫里) 기행
왜 어릴 적 살던 고향이 가끔씩 그리워지는 걸까? 익히 아는 대로 보잘 것도 없고, 기다려주는 이도 없는 그곳. 40년 가까이 떠나온 그곳. 초라하고, 볼품없는 숭악한 산골짜기. 기억나는 사람들조차 가물가물한 그곳.
그래도 평온리로 갈 때면 언제나 가슴이 북받치고, 머리가 뜨거워진다. 상주-청원 간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그냥 지나치는 그곳에 가끔 가보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50km 남짓. 가고 싶으면 한 시간 이내에 도달할 그 거리가 마치 우리가 살지 않는 선계이거나, 무릉도원이거나, 엘도라도라도 되는 듯이 멀리에 있다. 그래서 평온리에 가는 길은 늘 떨리고, 긴장되는 감정이 인다.
점촌에서 농암을 거쳐, 화북, 갈령재를 넘어 동관1리에서 우회전 하면, 장자불로 넘어가는 길이 이젠 포장까지 되어 있다. 그 때는 장자불 밑에서 올려다보면 높고 험한 산길이 구불구불 보였었는데, 이젠 아주 낮고 곧은길이 되어있었다. 이 고개만 넘으면 내가 태어나고 유년을 보냈던 장자불과 평온 웃마.
장자불은 두 명의 친구가 생각나는 곳이다. 영문이와 복수. 영문이네 집은 큰집이었고, 복수네 집은 작은 집이었다. 또 한 친구가 그 위에 살았던 것 같은데, 이름조차 가뭇하다. 그리고 나보다 어린 아이 ‘바우’도 살았었다. 강냉이 농사를 많이 지어서 우리는 그 집 강냉이를 먹었는데, 비가 오던 날 그 아이 이름을 빗대어 형이 문지방에 턱을 괴고 불러 주었던 ‘바우야, 바우야, 큰바우야!’하던 노래가 생각나는 ‘바우’. 그 아이 살던 집조차 가뭇하다. 이젠 영문네 집과 맞은편에 새로 지은 집, 그리고 한 300m 위에 한 집. 셋집만이 남아 있다. 복수네 집과 또 한 집은 빈 채로 세월을 이고 있다.
장자불 위 절골에는 할머니 산소가 있어서 1984년 이장하기 전까지 벌초하러 몇 번 갔다 왔다. 아주 멀고 험한 산을 올라가야 했다. 할머니 산소는 명당임을 알 수 있는 아늑한 곳에 있었다. 그러나 너무 깊은 산중에 있었다. 그러니 벌초는 그 당시 아랫마에 살던 고모, 고모부가 거의 해 왔다. 우리가 1971년 가을에 이곳을 떠났으니, 작은 고모와 고모부의 고생이 많았으리라. 장자불 영문네 집 앞에는 이 고모의 시어른 내외분 산소가 있는데, 오늘도 말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장자불을 지나 내려오면 배나무지가 나온다. 옛날 기억에 큰배나무지와 작은배나무지가 있었는데, 어디가 어딘지, 그 돌배나무들도 하나도 없다. 동관1,2리의 갈림길인 배나무지. 여기가 큰배나무지인지, 작은배나무지인지 알 수는 없으나 무서운 추억이 있는 곳이다.
동관2리 쪽으로 가면 고개 밑 오른쪽에 우리 밭이 있었는데, 그 밭에 엄마 따라갔던 추억은 낭만적이다. 언제나 푸근한 엄마와 함께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자체가 나에게는 큰 행복이었다. 엄마는 걸핏하면 어린 나를 떼놓고 옹기 장사를 나갔기 때문에 나는 늘 엄마와 떨어지는 걸 제일 싫어했다. 엄마가 옹기 팔러 나설 때면 언제나 됫박을 주려 끼고, 힘껏 울어 젖혔던 내 유년. 그 기억 속에 엄마와 함께한 시간들은 밭에 따라갔던 기억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한 번은 밭에 갔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붓고, 천둥번개가 지축을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 치맛자락을 붙들고 10리도 넘는 그 길을 따라오면서 계속 울기만 했던 무서운 기억이 생생하다. 또 그곳 밭 앞에는 큰 비알밭이 있었는데, 그 밭에는 소가 좋아하는 풀인 ‘새개이’가 지천이었다. 그래서 그 밭에만 오면 엄마는 언제나 소 풀을 베었는데, 한 번은 그곳에 큰 짐승이 앉아 있어서 엄마와 내가 기겁을 하고 살금살금 내려왔던 무서운 기억도 생생하다.
평온리 웃마와 장자불 사이는 진짜 산이 너무 높고 험한 곳이다. 첩첩산중이란 말은 이런 마을을 두고 말하면 틀림없을 것이다. 이 산들은 백두대간의 속리산 연봉들이지 싶다. 속리(俗離)는 바로 이곳을 두고 말하면 될 것이다. 지금에 가 봐도 달라질 것은 없는 그런 산골짜기다. 유년의 눈으로 보던 높이와 넓이의 현상은 다르지만 험준한 산골임은 변함이 없는 곳이다.
그 중간쯤에 서낭대이가 있는데, 아름드리 소나무가 길섶 산기슭에 아직도 그때 그 모습으로 서있다. 그 밑 도랑에서는 엄마 아버지가 이웃 사람들과 ‘희추’, 즉 화전놀이를 하던 모습이 어른거리기도 한다. 지금에 와서 보니 1급 청정수가 바로 이런 물을 가르치는 것임을 알게 된다. 화강암 반석 위로 흐르는 맑고 고운 물이 보기만 해도 속이 시원해진다.
서낭대이에서 보면 늘 무섭던 애창골이 보이는데, 그 애창골을 무서워하면서도 무엇 때문인지 여러 번 친구들과 그 골짜기를 갔던 기억이 난다. 애창골 밑에는 여름이면 우리들의 놀이터인 작은 송아지 덤벙과 큰 송아지 덤벙이 나온다. 작은 송아지 덤벙 옆에는 우리 밭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천궁을 캐오시던 모습이 눈에 선한 곳이다.
깊고 넓어서 어리버리 하며 물가에서 놀던 그 크던 덤벙이 이렇게 작을 줄이야. 40년의 세월 동안 퇴적물이 쌓여 도랑이 메워지기도 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얕고 작은 덤벙이란 것을 나이 먹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큰 송아지 덤벙은 유년의 눈으로 아주 깊어 몸을 담가보지도 못했던 곳인데, 나이 먹은 눈에 보이는 큰 송아지 덤벙도 너무나 작고 얕았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오는 유년의 목욕탕. 그러나 이 덤벙은 유년의 내가, 한여름 축축 쳐지는 몸을 이끌고 올라오면 언제나 시퍼런 색으로 몸을 식혀 주었던 것이다. 물놀이 오가는 길가에 피어난 빗자루 풀을 꼬깃꼬깃 뽑아오면 할아버지는 그것으로 부드럽고 폭신한 빗자루를 엮었었는데, 지금은 아스팔트가 풀씨조차 말려 버렸다.
내가 태어나고, 12살까지 살던 마을.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지금은 화남면) 평온리 33번지. 옹기 굴 흔적은 남아 있으나, 그 넓던 공장이며, 공장 마당은 흔적조차 보이질 않는다. 옹기 굴, 공장, 공장 마당은 유년의 놀이터였다. 숨바꼭질의 은신처로 이보다 더 좋은 지장물들은 없었다. 옹기 중 큰 독은 아예 번데기처럼 까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제일의 은신처였다.
한 번은 엄마가 옹기 장사를 나가고 없는데, 옹기공장 마당에서 신나게 진돌이놀이를 하며 놀았다. 그런데 그만 발을 잘못 헛디뎌 옹기 잿물 덤벙에 첨벙 빠졌다. 내가 온통 옹기 잿물로 유약처리가 된 것이었다. 엉엉 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지만 막막하기만 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코흘리개 내가 무엇을 어쩐단 말인가? 서럽고, 서러웠다. 엄마의 부재가 그렇지 않아도 서러운데, 이런 상황이 되자 그 설움은 더없이 커졌다. 더 크게 울었다. 다행히 뒷집 태연네 엄마가 나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상황의 서러움은 견딜 수가 없다.
가난으로 말미암은 어머니의 부재. 밤늦은 시간, 별을 이고 들어오시는 엄마를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른 아침이면 내가 깨기도 전에 또 나를 떨쳐 놓고 떠나셨던 엄마. 그 엄마가 지금은 86세다. 정신마저 혼미하시다. 나에게 그렇게도 포근하고, 넉넉하시던 엄마의 품이 가벼운 몸무게만큼 실낱같다. 6남매들을 빨아주고, 닦아주며 훠이훠이 살아온 80년의 세월.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다.’
태연네는 정말 이웃사촌이었다. 태연네는 부자였다. 그때 태연이는 세발자전거도 가지고 있었고, 원기소도 먹었다. 앞에는 태연네 큰 밭이 있는데, 그 밭에는 사과도 있었고, 감도 있었다. 물 건너 밭에는 밤나무도 있었다. 가을이면 그런 태연네는 온갖 곡식과 과일들로 집안이 가득하였다.
그러니 나는 온갖 과일이며, 곡식들로 만든 음식들을 언제나 맛볼 수 있었다. 내 것이 아니니 내가 먹어 보고 싶은 대로 먹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을 타박하는 것은 사치인지도 모른다. 내 것이 없으면서도 나는 일찍이 좋은 음식과 과일과 약과 장난감들을 다 섭렵할 수 있었다. 부잣집 태연네 덕분이었다.
태연네 집에 들어서자 마당 큰 그 집이 한 뼘밖에 되지 않은 듯이 작아 보였다. 크고 높아 보였던 집과 봉당도 나지막하였다. 사방에 둘러 서 있던 감나무들도 흔적이 없고, 높고 길게 둘러서 있던 담장들도 야지막하였다. 사람들도 부잣집 풍모가 사라졌고, 때 절고 노쇠한 산촌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그나마도 태연네 할머니야 그렇다 해도, 우리 엄마 보다 연세가 적은 태연네 아버지와 큰엄마도 다 돌아가셨고, 태연네 엄마가 77세의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마침, 희연이와 미연이가 인천에서 왔다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태연네 집 앞에는 내 생가가 지붕만 바꿔 입고, 그대로 서 있었다. 질기고도 긴 생가의 역사였다. 많은 집들이 헐리고, 사라졌는데, 어찌 내 생가는 아직도 그 모습으로 서있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곳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경숙이 누나와 내가 태어났으며, 다른 누나들과, 형이 공부를 하며 자랐던 곳이니, 우리 6남매들에게는 너무나 추억이 많은 집인 것이다.
주인이 현재는 거처하지 않고, 가끔씩 외지에서 들른다고 해서 집안은 볼 수 없었다. 대추나무 한 그루가 담을 넘어 나를 보고 있었는데, 우리가 심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본채에는 안방, 골방, 사랑방, 큰 부엌, 사랑방 부엌이 있고, 아래채에는 화장실, 마구, 도장이 있었는데, 확인할 수 없어 아쉽다.
집 앞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3분지 2 이상의 집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화전들도 우거진 산으로 변하였고, 골짜기들만 추억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앞산에도 한 번 올라가 보고 싶었고, 순심이골도 가보고 싶었다. 앞산을 올라가는 길엔 큰 동굴이 있었고, 그 굴에는 부처들이 있었다. 봄이면 진달래가 붉게 피었고, 참나무가 쭉쭉 뻗어있는 앞산.
순심이골에는 할아버지 산소가 있었는데, 그 산소에 딸린 밭에서 아버지 어머니, 누나들과 일을 할 때면 아버지께서 점심때마다 ‘식사시간!’하며, 우리들을 부르던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내가 1학년 땐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때 처음으로 동우점 큰고모, 팔영 당숙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많은 친척들이 오고, 음식도 많고 해서 할아버지 돌아가신 것을 슬퍼할 줄도 모르고, 신나게 친구들을 불러다가 음식을 먹이고, 나도 맛있게 몇날 며칠을 먹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상여를 따라 순심이골까지 따라갔었다.
할아버지와는 자주 한 방에서 지냈다. 잠을 같이 자기도 했고, 밥도 한 상에서 먹었다. 어떤 때는 할아버지를 안방으로 불러 밥을 먹었는데, 마루에서 사랑방을 억지로 건너다니면서 할아버지를 불러댔었다. 한 번은 할아버지가 산에 나무를 해오시면서 ‘아침이슬’이라는 열매를 따오셔서 먹었는데, 얼마나 맛있었는지 그 맛을 잊지 못해 한 번 더 먹어 보려고 했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열매 자체를 구경도 못해 보았다.
1984년 갑자년 윤 시월에 할아버지의 산소를 이곳으로 이장하기까지 역시 작은 고모가 산소를 보살펴 주셨다. 작은 고모는 아랫마을에서도 금산리 가는 곳인 ‘강정’마을에 살았는데, 아버지의 경찰 임지인 이곳으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사 오실 때 문경 팔영에서 오셔서 이곳에 있는 고모부 강씨와 결혼하였다. 고모부는 부지런하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먹고 살만한 살림살이였다. 가끔 아버지의 옹기 사업자금을 대주기도 했던 것 같았고, 아버지의 사업이 잘못되자, 우리 집에 양식과 금전을 많이 보태주었던 것 같다. 나와 막내누나도 1971년 가을 우리가 다시 문경으로 이사를 왔을 때, 엄마 아버지를 따라 바로 전학을 못하고, 서너 달 고모네 집에서 학교를 다닌 기억이 눈물겹다.
내가 다니던 학교 길은 멀고도 무서웠다. 웃마와 아랫마 사이에 밍막골이 있는데, 이곳은 개오지도 나오고, 담봇대도 나오고, 창꽃문디도 나온다는 무서운 곳이었다.
평온리는 이렇듯 늘 나에게 자극적인 기억으로 하여금 더욱 더 그리워지게 하는 곳이다. 볼품없고, 하잘 것 없는 그곳이 그럼으로써 더욱 그리워졌던 것은 아닌지? 아련하고, 잡히지 않는 기억들 만 다시 간직하고 떠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