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호박, 박한
문경 호박, 박한
한국전통시인 고성환
항상 미소를 짓고 있지만, 울음을 삼키고 있는 화가. 따뜻한 곳에 앉아서도 지독한 한기를 느끼는 남자. 예순을 바라보도록 형형한 눈빛으로 이글거리는 청춘의 눈을 간직한 사람. 호박만 그리는 박한. 차라리 이제 이름마저 ‘박호’로 바꿨으면 좋을 그 만의 상징.
그에게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은 욕보이는 말일지 모른다. 먹고 새면 하는 일이 그림인 사람에게, 그 그림으로 어렵게 풀칠을 하고 있는 그에게 지난 영광의 외형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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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술에 있어 상을 받는다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등단의 상을 받고 스러져 간 예술 초년병들이 그 얼마이던가? 등단 후, 얼마나 작가 정신으로 깨달음을 얻는가가 필요하다. 언제나 부족하다는 자세로 자신의 작품 내세우는 걸 겁내는 것. 조심조심 예술을 말하는 것. 그런 자세를 가져야 프로 예술가로 들어설 수 있다.
그리고 또 자신을 채우지 않으려는 자세로 허리띠가 항상 조여 있는 모습일 때, 그의 작품은 예술이 되고, 사람들로부터 감동이 일 것이다. 그림이, 시가, 음악이 예술이 될 때 인간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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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은 그러므로 인간인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인간을 좋아한다. 어느 날 그는 *인간이 그립다*는 일기를 쓴 적이 있다.
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무섭고 더럽고 치사하다.
더럽게라도 잘살면 그만인 세상이 역겹다.
사람이 싫다.
인간이 그립다.
사람의 탈을 쓴 악마가 세상에는 많다.
잘 구별하여 살아야 한다.
정신병자들이 너무 많다.
당뇨병 환자보다 암 환자보다 훨씬 많다.
오늘도 그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심조심 살아간다.
인간이 그립다.
조금은 무식해도 좀 가난해도
어리석은 인간이 그립다.
그러나 나는 행복 하다.
내 곁에는 몇 사람의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같이 사람을 싫어하며 같이 인간을 그리워하고
살아가는 한 인간이 있어
오늘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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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그의 그림 ‘호박’은 인간이다. 우주다. 그의 그림을 10여 년째 보고, 비로소 알았다. 무수히 많은 붓 칠 위에 수많은 사람들은 지워지고, 간단하고 단출한 인간이 태어나고 있다. 그의 얼굴이기도 하고, 그의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왁새골의 갈대이기도 하고, 공평의 구름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요즘 그가 깃든 *함창 태봉리*의 강바람이기도 하다.
초겨울 강바람은 태봉 숲에서
차갑게 불어온다.
함창 들
겨울채비로 빈들에는 논둑 갈대들만 무성하고
마을은 다가올 추운겨울에 조금씩 긴장되어 간다.
3년쯤 전에 폐교되었다는 영동초등학교
넘어져있는 축구골대는 녹슬어가도
일으켜 세울 아이들은 아무도 없고
중국에서 이사 온 노인 한 분이 학교를 지키고 있다.
작은 가게가 있고
동네에서 가장 큰집은
폐교 다음으로 쌀국수공장, 농협창고가 있다.
휘어진 농로를 걷다보니 배추밭을 지나
작은 교회가 나온다.
예배당 뜰은 깨끗하고
저녁노을 십자가를 붉게 물들인다.
작은 태봉, 큰 태봉 척동, 덕통
마을과 마을이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아름답고 조용한 동네
하교버스에서 내린 아이들이 재잘대며
내 곁을 스친다.
훗날 아이들은 갈대숲 농로길
아름다운 내 고향으로 오래오래 기억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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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모전동 중신기에서 태어나 1969년 중학교를 중퇴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식으로 그림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혼자 깨달아 가며 공부했다. 처음에는 조각을 하다가 1980년 그의 나이 26살부터 본격적으로 호박을 그렸다. 지금까지 30여 년 줄곧 호박을 그린 것이다. 거기서 그는 마침내 인간을 발견해 냈다. 우주를 발견해 냈다.
둥근 호박만큼 선이 아름다운 것이 없고, 풍요와 풍성함을 상징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향수와 추억을 자아내게 하는 호박은 겉모습에 불과하다.
그 속에는 한 생을 삭힌 인간이 들어 있다. 박한 자신이 들어 있다.
(박한 화가는 현재 안동 하회마을 ‘탈박물관’에서 기획초대전을 열고 있다. 그림 15점이 전시돼 12월11일까지 이어진다. 또 함창 태봉리 폐교된 영동초등학교에서도 청년작가들과 함께 11월24일까지 전시회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