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에서 박열(朴烈) 의사(義士) 40주기 추모제 봉행
박열의사기념관에서
문경출신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에서 특이한 족적을 남긴 박열 의사(호적명 박정식)의 40주기 추모제가 박 의사가 북한에서 1974년 서거한 날인 1월17일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 있는 ‘박열의사기념관’에서 봉행됐다.
박열의사기념사업회(이사장 박인원 전 문경시장) 주최로 열린 이날 추모제는 박열의사기념관이 주관하고, 예천 금당실 함양박씨 문중과 문경 함양박씨 응복종중의 후원으로 진행됐다.
이날 추모제에는 박열의사기념사업회 박인원 이사장이 초헌관, 박영수 문경부시장이 아헌관, 임규호 안동보훈지청장이 종헌관으로 봉청됐으며, 최주원 경찰서장, 현낙길 교육장, 현한근 문화원장, 이응천 문경시의회 부의장과 안광일, 김지현, 박병두, 박성도, 김휘숙 시의원, 권대진 노인회회장, 신현국 전 문경시장, 예천금당실 함양박씨 문중 대표 등이 헌화 분향하는 등 150여명이 참석했다.
고윤환 문경시장은 공직선거법 때문에 11시 추모제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부인 허은숙 여사가 참석했으며, 점심시간에 기념관을 찾아 추모제에 종사한 사람들을 격려하고, 제관들에게 인사했다.
이날 추모제는 ‘박열의사기념관’ 박성진 운영위원장의 약력보고, 박인원 이사장, 박영수 부시장, 이응천 부의장, 임규호 안동보훈지청장, 박나영 예천금당실 함양박씨 문중대표가 추모사를 했으며, 박열의사 모교인 함창초등학교 6학년 김대영, 엄태분 학생이 추모시를 낭송했다.
박인원 이사장은 “선생의 정신과 뜻을 잘 모르는 국민들이 많은 현실에서 이 추모제가 더욱 의미있다.”며, “이 추모제로 박열의사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이어받아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고,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을 고민하고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추모했다.
박영수 부시장은 “박열의사의 숭고한 정신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마련된 이곳이 문경시민의 정신문화를 드높이는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응천 문경시의회 부의장은 “조국을 위해 평생 살고 마지막까지 후진을 위해 애쓴 박열의사는 현대사의 중심에서 일제에 맞선 용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는 박열의사와 같은 분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잊지 말자.”고 말했다.
임규호 안동보훈지청장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 경제적 풍요는 박열의사의 애국정신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며 “일본은 여전히 반성하지 않고 역사왜곡이라는 우를 범하고 있는 만큼 자라나는 후대들이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할 수 있도록 박열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자.”고 말했다.
이날 지역인사와 관계자들은 추모사 이후 헌화, 분향, 헌작을 했으며, 재향군인회, 문경시자원봉사자회가 마련한 음식으로 음복을 했다.
박열의사기념관은 현재 박열 선생이 1968년 대동강변에서 찍은 사진 등 희귀자료를 우리나라 최초로 입수해 40주기 기념으로 전시를 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기념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박열 의사는 1902년 문경시 모전동 311번지에서 출생해, 기념관이 있는 마성면 오천리로 이사 와 성장했으며, 1912년부터 15년까지 4년제인 함창공립보통학교를 다니고, 1916년 서울에 있는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입학하는 등 열심히 공부하는 수재였다.
그러나 경성고보 3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에 나서 적지의 중심부인 일본 동경에서 청년시절에 반제국주의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박 의사는 이 과정에서 일왕을 죽이려고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22세에 붙잡혀 사형을 언도받고, 22년 2개월이라는 독립운동 사상 유례가 없는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한 1945년10월27일 석방됐다.
해방 후 45세의 박 의사는 ‘신조선건국동맹’ 결성,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유해 발굴 송환’, ‘재일거류민단 창단’, ‘이승만 박사와 회담’ 등 우리나라 독립정부 수립에 큰 역할을 맡았다.
그러다가 46세인 1947년 당시 동경국제신문 기자인 정의숙 여사와 결혼, 아들 박영일 장군과 딸 박경희 씨를 슬하에 두게 됐으며, 47세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최고의 공식직위에 오르고, 대한민국 건국의 지표를 담은 ‘신조선혁명론’을 저술,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선생의 진면목을 보여줬다.
1949년 48세에 한국으로 귀국한 박 의사는 ‘박열장학회’를 설립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이해 8월5일 4박5일 일정으로 고향인 대구와 문경을 방문해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날의 기억을 아직까지 잊지 못하는 문경시민들도 아직 많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0년 49세의 나이에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날 바로 박 의사는 북한군에 의해 납북,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북한에서 ‘평화통일촉진협의회장’을 맡는 등 활동을 하다가 1974년 1월17일 서거했다.
대한민국에서는 박 의사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시민사회단체인 YWCA가 명동 강당에서 2월8일 추도식을 거행했으며, 1989년 3월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현재 아들 박영일 장군은 현역에서 은퇴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21세에 일본에서 사상적 동지로 만나 박 의사와 독립운동에 나섰던 일본 황실 출신으로 알려진 2살 연하의 금자문자(金子文子. 일본명 가네코 후미코)여사는 옥중에서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수기 4권과 ‘단가’ 203수를 남기고, 1926년 옥중에서 자결, 그해 11월5일 문경읍 팔영리 박 의사의 선영에 안장됐으며, 이 묘소는 2003년 11월 현재 박열의사기념관 왼쪽 기슭으로 이장했다. 이런 기네코 여사를 기리기 위해 현재 박열의사기념관에는 일본인들이 꾸준히 찾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