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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미친 사람들-조향순 문경문협 회장

문경사투리 2016. 9. 6. 11:02

곱게 미친 사람들
조향순 문경문협 회장

그저께 모임 후 같은 차를 타고 가야할 김종호 시인이 슬쩍 빠지더니 키다리 아저씨의 긴 그림자처럼 혼자서 휘적휘적 영강교를 건너고 있었다. 불러도 굳이 혼자서 걸어가겠다고 했다. 뭐가 못마땅해서 삐쳤나? 그 이유를 몰라서 궁금했는데 새벽에 그 궁금증이 깨끗이 풀렸다. 정확히 426, 그가 카톡!카톡! 불렀다. 어제 걸어서 다리를 건너다가 

잔물결 이는 강에서
다릿발은 살아 움직인다
강을 거슬러오르면서도
좁혀지지 않는 그 간격
발사위 사뿐거리는
무용수의 발꿈치 

그러니까 시 한 편을 쓰기 위해서 한밤중에 혼자 다리를 건넜다는 말씀, 영강교를 받치고 있는 다릿발을 보면서 시를 썼다는 말씀이다. 버스가 지나가면 나는 가만있는데 나무가 지나가는 것처럼 흘러가는 강물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뿌리박고 있는 다릿발이 살아 움직였겠지. 그 투박한 시멘트 덩어리가 사뿐사뿐 무용수의 발꿈치로 다가왔겠지. 미쳤어. 곱게도 미쳤어. 그는 시()에 곱게도 미친 시인이었다.

나는 요즘 미친, 곱게 미친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이들에게서 시는 아주 친한 친구인 동시에 생활이다. 모든 것이, 모든 일이 결국은 시로 간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옆집으로 뻗은 오동나무를 베다 말고 고성환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오래된 집에 있던/ 오동나무를 베었네/ 홀로 사신 할머니의 서러움이/ 무너졌네/ 까치가 달아주던 기다림이/ 떨어졌네/ 하늘이 나타나자 주위가/ 숨죽였네
 

황인필 시인은 그의 말 자체가 시다.

어제 식전에 시누님이 애호박을 따오셨는데, 꼭지에서 눈물방울이 끈적 나왔습니다. 문득 선생님 시들이 생각났습니다. 선생님 시에는 꼭 한 방울 눈물을 숨겨두고 계십니다. 저는 알밤을 줍듯 낼름 줍습니다. 느낌이 참 좋습니다. 

문경문인광장이란 소식지를 작품모음집의 성격으로 바꾸고 한 달에 한 번씩 공통 소재로 같이 습작을 해보는데, 그 미친 모습들이 너무나 보기 좋다.

이란 소재를 제시하자 말자 김시종 시인은 바로 그 자리에서 낮달을 내놓으셨고, 중후한 풍채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의 낱말과 문장에 매달려 끙끙대는 채만희 시인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시가 뭐라고,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온다 해도, 돈으로 치면 그게 어디 돈 축에 들겠는가. 하현달을 보고 '어느새 몸 풀었나'라고 하는 채광숙 시인이나 '작은 손톱 위에 얹힌 달을 보았네'라는 김선옥 시인이나 모두 미쳤다. 참 곱게도 미쳤다.

무엇에 미친다는 것은 그 무엇에 올인, 그야말로 그 방면에서의 프로가 가져야할 기본자세이다. 이 미침이 없이 감히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 미침에는 괴로움도 따르겠지만 이 미침이 있어야만 최고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얻는다. 그러니 미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