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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벳푸 여행
    카테고리 없음 2008. 8. 11. 22:40

     

     

    걸이가 2살 나던 1992년 여름휴가. 신혼여행도 변변히 가지 못했던 우리 내외는 숙부가 살고 계신 일본 벳푸로 여행 겸 친지방문을 떠났다. 그 때는 처음 해외여행이라 모든 것이 낯설고 물설어 무엇을 보고 왔는지,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어떻게 왔는지조차도 모를 벙벙한 여행이었다. 모두가 숙부님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만 다녔으니, 로봇이 여행하는 것 같은 여행이었다.


    그 후로 몇 차례 더 작은 집엘 다녀왔다. 그 때마다 누군가가 늘 마중을 나오고, 누군가가 늘 안내를 하였다. 수동적이고, 소아적인 여행이었던 것이다.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걸이와 유진이가 몇 해 전부터 말을 꺼내오다가 실행하지 못했던 일본벳푸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고등학교 1학년으로서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경희는 아쉽지만 현실 때문에, 그리고 내년에 일본 수학여행을 가기 때문에 같이 참여하지 못했다. 내자는 걸이 등록금을 마련해야하는 등 경제적 이유로 참여하지 못했다. 어머님은 여러 번 다녀오셨고, 연세가 많으시기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다. 여섯 식구 중 반만이 떠나가게 되었다. 아주 경제적이고 능동적인 방법을 찾아 우리는 길을 나섰다. 

     

    2008년 7월 29일 아침 6시. 잠꾸러기 우리 셋은 눈을 비비며, 어제 사다 놓은 통닭 2마리(양념 1마라, 프라이드 1마리)를 싸들고 집을 나섰다. 작은 집에 줄 선물로 안성탕면 1박스, 마른 오징어 2축, 구운 김 30봉지를 함께 들고서....


    점촌역에서 6:54분 부산행 무궁화호를 탔다. 출발 기념으로 점촌역 앞에서 사진도 한 방씩 찍었다.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의 고향 방문 때마다 이용하던 기차였다. 우리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푸른 들판과 도시와 아름다운 산들을 지나치며 구경했다. 말 그대로 走馬看山. 그래도 아침 햇살이 부셔오는 조국의 산하는 아름다웠다. 영남의 남과 북을 종으로 질러 달리는 노변은 지상천국이었다. 낙동강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강변은 더없이 넉넉하고, 아늑했다. 수채화 같은 아침여행길이었다.

     

    이 기차는 부산역에 10:40에 도착했다. 세계 4번째 큰 항구인 부산항을 향해 우리는 택시를 탔다. 해외로 나가는 절차를 밟았다. 예약한 표를 받고, 부두이용료를 내고, 검색을 받고, 출국심사를 마쳤다. 드디어 해외로 나가는 준비 완료. 처음 맞는 걸이와 유진이의 표정이 제법 상기되어 있다. 새로운 것들을 보는 것에 대한 호기심을 애써 외면하는 모습이 순진하기만 하다.


    12:00 부산발 후쿠오카(福岡)행 『BEETLE』쾌속선이 부산항을 떠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부산항과 부산 시내가 한 폭의 병풍처럼 펼쳐지기 시작했다. 부산항의 크고 거대한 무역선들과 컨테이너들이 우리의 국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이 배는 자맥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물 위를 나는 것 같았다. 물결에 흔들리는 느낌도 없고, 파도에 부딪히는 느낌도 없다. 부산과 직선거리 170km인 후쿠오카로 향하는 배는 3시간 만에 일본에 닿았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부두 대합실로 나서자 숙모님과 사촌 형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우리끼리 찾아가려던 계획은 차질을 빚었지만, 일본의 비싼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벳푸까지 가는 것보다 우리 돈이 안 들어가니 기분이 좋았다. 물론, 숙모님과 형님의 관심과 사랑이 느껴져 더 좋긴 좋았다.

     

    후쿠오카에서 벳푸까지 150km.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새로 장만한 형님의 차가 작았지만 단단해 보였다. 푹푹 찌는 더위는 한국보다 5도씨이상 더 높은 것 같았다. 역시 한국이 사람살기 좋은 나라라는 걸 또 한 번 느꼈다.


    후쿠오카 외곽의 고속도로휴게소는 한국보다 작고 한산했다. 핫바와 어묵과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한국과 별다른 것 없는 음식이었다. 그 다음에 들른 오이타(大分) 외곽의 휴게소는 거의 화장실만 있는 작은 규모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고속도로휴게소나 크고 복잡한데, 일본은 정말로 휴게소 하나만은 우리에게 턱도 없이 후진적이었다. 여기서는 운전하는 형이 잠깐 눈을 붙였다.

     

    마침내 작은집에 들어섰다. 저녁 6시. 문경 집에서 벳푸 작은집까지 12시간 만에 도착한 것이다. 불고기[일본에서는 ‘燒肉’]식당을 운영하는 작은집에서 여러 부위의 쇠고기를 내놓았다. 너무도 맛있어서 배부른 것이 한스러웠다. 한우는 비길 것이 못되었다. 우리도 얼른 이런 쇠고기를 생산해야 할텐데....


    긴 여독에, 식곤증에 우리 셋은 저녁을 먹은 자리에서 곧 잠들었다. 숙모님이 깨우시기에 일어났더니 밤 11시. 작은집 식당이 일과를 마친 시각이었다. 우리는 숙모님이 매일 하시는 방식인 야간 온천을 따라나섰다. 당초에 작은집 온천을 이용하는 게 그리워 아이들에게 자랑까지 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작은집 온천이 유황 떼가 파이프를 막아 지금 뚫는 중이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중탕 행.


    대중탕의 시설은 정말 보잘것없었다. 서가 같이 개방된 옷장. 탈의실이 따로 없는 욕탕. 샤워기도 없는 시설. 값도 100엔. 물 하나는 정말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뜨거운 물이었다. 우리의 온천은 물 데우느라 고생인데, 일본 온천은 물 식히느라 고생이다.


    걸이와 나는 형과 함께 남탕으로, 유진이는 숙모와 함께 여탕으로 갔다. 우리는 너무 뜨거운 물 때문에 애를 먹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익숙하게 탕의 물을 퍼서 몸에 끼얹고, 머리를 감고, 탕 속에 들어가고 했다. 억지로 우리도 그렇게 따라했다. 열대야가 기승인 밖에서보다 더 더웠으나, 온천을 하고 나오자 얼마나 시원하고 상쾌하던지....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벳푸여행 하루를 보냈다.


    7월 30일 수요일. 날씨 - 맑음


    어제 일정이 피곤했든지 우리 셋은 정오가 되도록 잤다. 그러나 푹푹 찌는 더위 때문에 더 이상 잘 수 없었다. 피곤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찌푸둥한 몸을 일으켰다. 땀이 흥건한 게 영 찝찝했다.


    숙모님이 차려 준 아침 겸 점심상을 받았다. 간단한 차림이었다. 엊저녁에 잘 먹은 탓도 있고, 비싼 쇠고기를 더 먹겠다는 염치를 부릴 수 없어 그냥 간소하게 달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숙부님 산소[はか-墓]를 찾아 성묘를 하였다.


    17세에 도일(渡日)하여 19세에 장가들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결혼한 후, 숙모님은 고향집에 그냥 두고, 다시 홀연히 일본으로 오셨던 숙부님. 2년 뒤 숙모님도 일본으로 건너오고, 그 때부터 이역만리(그 당시에는 머나먼 타국 땅이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전까지 일본은 정말 가깝고도 먼 나라였다.) 타관 땅을 밟아서 돌았다고 한다.


    먹고 살만하던 때. 분단된 조국의 현실 속에 그 당시 국력이 강했던 북한의 힘을 입어, 일본 내에서 조총련의 위세는 높아갔고, 그런 조류에 휩쓸려 조총련에 가입했던 숙부님. 어디를 가든 늘 십장이라도 해야 했던 리더십을 가졌던 숙부님. 그래서 조총련의 지방 책임자까지 올라갔던 숙부님. 당연히 그리운 고향 땅을 밟을 엄두도 못 내고, 만경봉호를 타고 북으로까지 갈까를 망설였던 숙부님. 1968년 동경올림픽을 계기로 숙부님이 아버지를 초청하게 되고, 25년 여 만에 만났던 형제의 상봉에서도 서로 사상의 간격을 좁히지 못했던 숙부님. 그래도 고향, 부모형제는 잊지 못했던 숙부님.


    마침내 사상적 전향을 하여 1978년(내가 고등학교 2학년 초였다.), 35년 만에 재일교포고향방문단 일원으로 고국 땅, 고향 땅을 처음 밟았던 숙부님. 그 때까지도 북한의 체제를 우월하게 생각하고 계신 편린들이 말투 곳곳에 배어있던 숙부님. 그러나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우리의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북한의 경제가 낙후 일로를 걷는 것에 비례하여 완전한 사상적 전향을 하셨던 숙부님.


    갑자년 윤시월(1984년 11월)에 흩어져 있던 선조들의 묘를 한 곳으로 이장하시고, 상석을 두루 하셨던 숙부님. 그리고 그 후로 매년 음력 10월 초, 시사를 지내러 꼭 오셨던 숙부님. 80세를 넘기시면서 이번 길이 마지막은 아닐지 우스개 삼아 말씀하시곤 허허 웃으시던 숙부님. 그리고 2005년 10월 시사를 한 달여 앞두고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나신 숙부님. 86세의 파란만장한 인생유전을 한 줌의 재로 남기시고 영면하신 숙부님.

    그런 숙부님을 모신 이 묘소. 벳푸만이 쪽빛 하늘과 닿아 남태평양으로 이어진 곳을 고스란히 바라보고 있는 이곳. 숙부님은 아직도 더 먼 세계로 가시기 위해 이곳에 계신 것은 아닌지. 어릴 때 할머니께서 ‘종림이는 물 건너 멀리 가서 살아야 잘 살 수 있는데...’ 하셨다고 어머님은 늘 말씀 하셨고, 물 건너 일본에 가신 것은 운명을 잘 받든 거라고 안도하셨던 어머님의 말씀과 한 숨이 동시에 귓가를 스치는 이곳.


    우리는 꽃을 꽂고, 향을 살라 합장을 했다. 걸이와 유진이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숙부님의 환영이 어리는 듯 숙연한 모습이다. 참으로 우리를 어여삐 여겨 주셨고, 큰집을 위해 어려운 형편에서도 뭉치 돈을 보내오셨던 가슴 따뜻한 숙부님의 그 선한 눈빛이 내 눈에 어른거리면서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났다. 회자정리(會者定離)란 이를 두고 이름 하는지?


    우리 집에서 남편도 없이 2년을 살았던 숙모님을 아버지께서 어렵게어렵게 수속을 밟아 숙부님께 보내던 날. 그날 이야기를 숙모님으로부터 몇 차례 들었고, 부산항의 연락선을 보면서 그 생각이 나 이미 올 때 한 번 울었던 나. 그래서 나에게 일본 작은집에 오는 길은, 그리고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가슴 찡한 아린 아픔을 안고 나드는 길이 되었다.


    우리 아버지나 숙부님이나 한마디로 장정들이셨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힘도 세고, 어디 형제가 나서면 무서울 것이 없는 청년시절이었다고 한다. 그런 분들이 눈물은 얼마나 흔한지, 생전의 아버지나 숙부님이 무슨 말을 하다가도 끄떡하면 울먹이며 눈시울을 붉히고, 목소리가 울음에 젖던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그 양반들 중 아버지가 언제 올지도 모를 숙모님을 데리고, 부산항 부두에서 이별하는 장면은 말을 안 해도 알 것 같다. 그 때 부산항 부두에는 그야말로 갈매기만 슬피 울었다는데, 연락선에 오르는 제수씨와 시숙의 이별에서 시숙의 그 큰 눈에서 달구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니, 이 얼마나 통곡할 이별이란 말인가? 그 이별 후, 동경올림픽 때 한 번 서로 보고 영영 이별이었다니 사람은 정말 무엇으로 사는지?


    우리는 성묘를 마치고, 벳푸의 관광필수코스인 지옥(地獄) 순례에 나셨다. 천당(天堂)이면 천당이지, 하필 지옥인가? 순례의 길이 명쾌하지만은 않았지만, 순례를 하면서 왜 지옥이라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간나와[鐵輪]․가메가와[龜川] 지옥 일대는 천년 이상 오랜 예부터 뜨거운 증기․흙탕물․열탕 등이 분출하고 있었음이 ‘붕고[豊後]풍토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주민들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불길한 토지로 인식되어 왔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주민들로부터 ‘지옥’이란 이름으로 불리어졌고, 지금도 간나와[鐵輪]지방에서는 온천 분출구를 ‘지옥’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총 9개의 지옥을 순례하였다. 처음이 방주지옥(防主地獄). 일본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온천수가 올라오면 회색빛 물질이 풍선 부풀어 오듯이 봉긋봉긋 팽창했다 사그라지곤 하기를 되풀이 하고 있었다. 그런 곳이 여러 군데였다.


    두 번째 본 곳은 해지옥(海地獄). 짙푸른 코발트색을 칠한 것 같은, 바다 빛 같은 연못이다. 98도씨나 되는 물에서 김이 무럭무럭 오르고, 그 밑에 물이 맑고 푸르게 넘실대고 있다.


    세 번째 지옥은 귀석방주지옥(鬼石防主地獄). 방주지옥과 같이 잿빛 진흙이 끓어오르면서 크고 작은 구형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삭발한 스님 머리를 연상하게 한다.


    네 번째가 산지옥(山地獄). 산의 여기저기에서 증기가 세차게 치솟고 있는 곳이다. 90도 온천수에 세계 각국의 희귀동식물이 생기 넘치게 자라고 있기도 하다.


    다섯 번째는 가마도지옥. 우리말로 하면 솥 지옥이다. 가마와 솥이 일본어와 한국어로 같은 뜻인데, 우리는 역전앞, 가마솥 등으로 이중 말을 하고 있다. 옛 일본의 문화 중 조상신을 모시는 가마도하치만궁 신사에서는 봄, 가을로 축제를 열면서 지옥의 증기로 밥을 지어 신전에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가마도지옥이란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여섯 번째는 귀산지옥(鬼山地獄). 악어지옥이라고도 한다. 1923년에 온천열을 이용하여 악어사육을 시작, 현재 150여 마리가 이 온천수에서 서식하고 있다.


    일곱 번째는 백지지옥(白池地獄). 물 빛깔이 청백색을 띠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온천수가 분출하면서 무색투명하던 물이 온도와 압력저하로 인해 물빛깔이 청백색으로 변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여덟 번째는 혈의지지옥(血의池地獄). 바닥의 붉은 점토가 펄펄 끓어오르고 있다. 붕고[豊後]풍토기에는 적탕천(赤湯泉)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에서 최고 오래된 천연지옥이라고 한다. 이곳의 빨간 점토는 피부병에 잘 듣는 ‘키노이케연고’로 만들어지고 있다.


    마지막 아홉 번째가 용권지옥(龍卷地獄). 말 그대로 멈추어있던 온천수가 갑자기 분출하여 용이 힘차게 솟는 것 같은 간헐천이다.


    너무도 덥고 긴 시간 동안 지옥을 순례하였더니 만사가 귀찮아졌다. 사람에게 있어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습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실감나는 순례였다. 발밑에 끓고 있는 물의 기온이 느껴지는 것 같은 지옥을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귀석방주지옥을 가기 전에 발을 담그고 족탕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족탕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이 순례는 더 피곤했을 것 같다. 지옥순례 길에는 한국인들로 넘쳐났다. 일본 내국인 순례 객보다 한국인이 더 많았다. 반갑기도 했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너무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왠지 마음을 편하지 않게 했다. 나도 그럴런지....


    지옥순례를 마치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좋은 횟집으로 갔다. 저 작년 우리 집에 오셨던 치과의사 선생님이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만찬을 베푼 것이었다. 우리는 진귀한 음식을 많이 먹었다. 끊임없이 나오는 우리나라 일식집 같은 코스 음식이었다. 너무도 융숭한 접대를 받았다.

     

     

    3시간의 만찬을 마치고 돌아왔다. 저녁에는 막내누나와 그 가족, 외손자까지 왔고, 큰누나도 왔다. 동경에 있는 큰형만 빼고 다 모인 것이다. 4살짜리 막내누나의 손자 녀석이 얼마나 붙임성이 있는지, 우리와 말이 안통해도 장난을 걸어오고 잘도 놀았다. 특히 내가 사진을 찍어주자 포즈까지 취했다. 작은집 여기 저기 있는 꽃들 앞에서 이리저리 포즈를 잡아 몇 카터 찍었다. 그리고 우리는 작은집 일과를 마친 늦은 밤에 어제와 같이 대중온천탕엘 갔다. 온천은 하루 동안 더위로 누적된 피로가 싹 가시는 보약 같은 일이었다.


    7월 31일 목요일.


    아침엔 예의 점심 때 가까운 시각에 우리는 일어났고,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작은 집의 막내누나가 우리를 챙기는 날이었다. 유진이가 일본의 옷이 한국보다 싸다며, 옷. 옷. 해서 우리는 백화점 쇼핑을 가기로 하였다.

     

    설마 일본의 물가가 한국보다 쌀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따라 나섰는데, 오이타[大分]까지 갔다. 역시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옷값이 한국보다 쌀 턱이 없었다. 그래도 나선 김에 우리는 옷을 골랐다. 유진이는 제 맘에 드는 것이 있다고 유행하는 스타일을 하나 골라 입었다. 핸드백까지 하나 선물로 받았다. 같이 못 온 언니를 위해 옷 하나를 또 골랐다. 걸이는 됐다며 손사래를 쳤다. 계산은 작은집 막내 누나가 했다.


    그리고 우리는 벳푸에서 새로운 명물로 등장한 ‘아시아태평양대학’엘 갔다.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해안 높은 산 위에 이 학교는 자리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이 학교의 기사를 신문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새로운 명문대학으로 일본에서 부상하고 있다는 글로벌대학이다. 재학생 중에 일본인보다 외국인이 많다고 한다. 그 중에 한국유학생들도 많다고 한다. 그런데 학비가 너무 비쌌다. 자비 유학은 힘든 학교 같았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 왔다. 막내누나는 바쁜 시간을 내서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작별했다. 오늘 하루를 마무리 하는가 싶었는데, 작은 집 막내누나의 딸이 어제 그 아들을 데리고 우리를 안내해 주기 위해 왔다. 우리는 숙모님이 다시 나가보자고 해서 벳푸시내 백화점엘 갔다. 거기에도 좋은 옷들이 많았다. 옷 사러 멀리 갈 필요도 없는데, 내말 듣고 멀리까지 가지말지 왜 오이타까지 갔다 왔느냐며 숙모님의 지청구가 이어졌다. 그러게 말이예요. 맞장구를 치면서 쇼핑을 했다. 유진이는 슬리퍼를 사고, 옷도 하나 더 사고, 신이 난 것 같았다.


    저녁에는 큰누나, 둘째누나, 막내누나, 다 모여서 식사를 하고 다 같이 대중온천탕 행. 시원하게 온천을 하고 가게에 가서 팥빙수를 먹었다. 우리의 팥빙수에 비해 만드는 방법도 다르고, 맛도 달랐다. 우리의 생과일 팥빙수에 비해 이곳의 팥빙수는 과일향이 나는 시럽을 넣어주는 팥빙수였다.


    우리 모두가 머릿결까지 보들보들한 것이 온천을 몇일 한 효과가 났다. 그러나 이 날이 온천의 마지막이었다. 내일이면 떠나야한다. 더 있고 싶기도 하고, 빨리 집으로 가고 싶기도 한 여행의 딜레마. 시간이 부족해 아쉽고, 돈이 부족해 아쉽고....


    8월 1일 금요일.


    8시 18분 기차를 타기 위해 5분 거리의 역엘 7시에 집 나서 왔다. 연세 많은 숙모님의 부지런 때문이었다. 시간을 맞춰 생활하는 현대인들에 비해 언제나 서둘러 먼저 준비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우리 선대들의 억척같은 부지런함. 배워야 할까? 버려야 할까? 30분은 충분히 더 잘 수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 어떨 결에 기차역 대합실에 앉아 덜 깬 잠을 털어내느라 고생을 했다.

    이제 처음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 일본 여행을 해 보는 순간이다. 누군가 늘 마중 나오고, 배웅해 주고 했는데, 능동적인 여행은 20여년 만에 처음인 것이다. 이 기차는 후쿠오카의 하카다[博多]역에 2시간 만에 닿을 것이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하카다 항에 갈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한국 오는 배를 탈 것이다.


    머릿속에 그린 귀국 일정대로 우리는 일정을 시작했다. 개찰구에 하카다행 열차가 온다는 자막을 보면서 숙모님과 이별을 했다. 늘 이별이란 이렇게 진한 눈물을 머금게 하는 것이라는 걸 오늘도 확인해야했다. 숙부님을 보내신 것처럼, 숙모님도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리고 이 순간이 그런 이별이란 생각이, 이내 진한 눈물을 머금게 한 것이다.


    열차는 신나게 달렸다. 숙부님이 철공장엘 다니다가 도망쳐 나왔다는 고쿠라[小倉]는 마치 고향을 보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60여 년 전.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내 혈육이 사는 것이 무엇인지? 돈이 무엇인지? 낯설고 물선 땅에서 쫓기며 살았다는 역사가 아리게 가슴을 찔러 왔다. 이런 곳을 전전하며 오늘의 작은 집을 세우셨다니 인생역정이란 이렇게 모질고도 아린 것일 줄이야.


    우리는 숙모님이 만들어 준 주먹밥을 아침 대신 열차 안에서 먹었다. 남들이 볼라 숨어가며, 서로 눈짓을 해가며, 눈알을 부라리며 먹는 맛이 학창시절 배고플 때 수업시간에 도시락 까먹는 맛 같았다.


    하카다 기차역에서 내려 우리는 쉽게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가 말도 안통하면서도 무엇인가 이야기를 자꾸 했다. 택시 안에는 그림이 몇 개 있었는데, 그 그림이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그린 것이고, 그 그림은 자기가 그린 것이라고 우리는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택시기사의 자랑이라는 것도 알았다. 서푼도 안 되는 일본말에, 영어에, 바디랭귀지까지 우리는 서로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카다 항구. 올 때 타고 왔던 배가 출발하기까지 2시간가량 지체되었다. 올 때는 잘 몰라서 2층 중간에 앉아왔는데, 갈 때는 1층 창가로 표를 달라고 하였더니 바다 풍경을 잘 감상할 수 있었다.

    멀리 부산항이 보이기 시작할 때의 일렁이는 가슴은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3박 4일의 짧은 일정이지만 ‘내 사는 곳이 마치 그림 같은데...’라는 권섭 선생의 17세기 여흥이 실감나기도 했다. 후쿠오카가 부산보다 작은 도시이긴 하지만 일본의 국력이 우리의 몇 배나 된다는 걸 견주어 대단해 보이던 후쿠오카도 부산에 비해서는 새발의 피였다. 뻗어나라 대한민국이여!


    배가 연착하는 바람에 부산 시티투어를 생각했던 당초 계획은 접어야 했다. 주말을 맞은 그 큰 부산역은 초만원이었다. 억지로 우리는 입석표를 구했다. 3시간 30분을 가야하는 점촌까지 입석이라. 우리 셋은 구포에서 구미까지 영락없이 서서 와야 했다. 화장실이 있는 차량과 차량을 잇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서서 왔다. 덮고 시끄러웠지만 그런대로 맛이 있었다. 걸이와 유진이도 싫지는 않은 표정이다. 내가 대구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일부러 집에 오는 기차를 입석으로 끊고, 열차와 열차 사이에서 놀며왔다는 말을 아이들에게 해주면서 나 스스로 그 때 그 시절로 돌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밤 10시. 16시간 만에 점촌역에 도착했다. 나의 준마는 기착역 앞 공터에서 나흘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배가 고팠다. 야식집으로 갔다. 주린 배를 채웠다. 아침에 숙모님이 싸준 주먹밥 이후 처음 맛보는 음식이었다.


    그리고 바로 우리와 같이 다녀오지 못한 둘째 경희가 공부하고 있는 점촌고등학교엘 찾아갔다. 경희는 우리의 방문에 놀라워하고, 고마워했다. 유진이는 언니를 위해 산 옷을 꺼내 주었다. 아시아태평양대학에서 산 공책과 볼펜도 줬다. 공부를 해야 한다고 놀고 싶은 걸 꾹 참고 지내 준 경희가 퍽이나 어른스러워 보였다. 잠시의 여흥으로 길고 긴 고생을 않겠다는 저 불굴의 의지와 투지가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세상에 경희 같은 노력으로 못 이룰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왔다. 집에는 집사람과 어머니가 밤 12시인데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 가정, 고향, 조국. 더 없이 소중한 나의 것들이 있음에 아늑하고 포근함을 알게 해 준 3박 4일의 3부자녀 일본벳푸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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