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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의 노래
    카테고리 없음 2008. 9. 13. 19:38

     

    창조적 전술과 불퇴전의 용기

    - ‘칼의 노래’를 읽고-


    문경서중학교 2학년 2반 고유진


    지금부터 400여 년 전인 1592년 4월 13일, 고요한 우리나라 조선에 일본이 침략했다. 아무 준비도 없었던 우리나라는 속수무책으로 20여 일만에 부산에서 서울까지 점령당하게 되었다. 선조 임금은 1592년 4월 30일 의주로 피난길을 나섰고, 이틀 뒤 서울은 일본군 손에 함락되었다.

     

    1545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순신 장군은 32살의 늦은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고, 함경도 국경지방에서 육군 장교로 처음 나라 일을 맡은 후, 15년 동안 육군과 해군을 오고가면서 나라 지키는 군 장교로 일하고 있다가 47세인 1591년부터 전라 좌수사(正三品)로 일하고 있었다. 전라도 서쪽 5개의 육지 고을과 5개의 포구 고을을 맡은 해군사령관이었다. 임진왜란은 부산, 즉 경상 우수영에서 시작되었고, 따라서 임진왜란 초기에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과 교전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나라가 20여 일 만에 일본군에 서울까지 짓밟히게 되면서 조용하던 나라 전체에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정규군들도 정열을 정비하여 일본군과 맞서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 5월 4일, 일본군이 서울을 함락한 이틀 후에 드디어 처음으로 출정을 하게 되었고, 5월 7일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이면서 최초의 승전으로 기록되고 있는 ‘옥포해전’에서 많은 일본 함대를 격침시켰다.

     

    이순신 장군은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처음으로 거북선을 투입하여 큰 전과를 올리고, 자헌대부(資憲大夫, 正二品 下階)로 승품하게 되었으며, 7월 6일 3차 출정에서 그 유명한 ‘한산도대첩’을 펼쳤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학익진(鶴翼陣)’이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전술을 선보였고, 이 공로로 장군은 정헌대부(正憲大夫, 正二品 上階)로 승품 되었다.

     

      

    그 후 1593년 8월 삼군수군통제사[경상,전라,충청도 삼도의 해군사령관]로 임명받은 장군은 소강상태로 접어든 전쟁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1593년과 1594년 2년 동안, 전쟁 중의 조선은 큰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어갔고, 사람을 잡아먹는 참혹한 굶주림에 시달리던 때이기도 했다.

     

    1597년 소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기 전 2월 26일.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통제영에서 ‘군공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기동출격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조정은 이런 장군의 죄를 입증하지 못해 4월 1일 장군을 출옥시켰고,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명하였다.

     

    그 해 4월에 장군은 어머님을 여의었고, 상중(喪中)인 7월 23일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는 전임 장군 원균이 쓰다가 남긴 ‘배 12척’을 가지고, 적선 330척과 맞서 싸워 33척을 격침시키고, 나머지를 도주하게 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한 달도 채 안된 10월 14일 셋째아들 ‘면’이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장군의 집이 있던 충남 아산에서 죽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아들이 죽어서도 고향으로 갈 수 없었던 장군은 1598년 임진왜란의 7년 전쟁이 마지막을 치닫고 있던 11월 19일 노량전투에서 적선 200여척을 격침시키고, 50여척을 �아내는 전과를 올린 후, 적탄에 맞고 54세를 일기로 전사했다. 전쟁은 끝났고, 나라는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 장군은 갔고, 그의 사랑하는 가족들도 많이 갔다.

     

    ‘칼의 노래’는 정유재란부터 시작하고 있다. 원균의 조선 수군이 처참하게 패전한 폐허 위에 서 있던 장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남은 배 12척 앞에 서 있던 장군의 낭패한 모습이 그 당시 나라의 현실과 닮아 있기도 하다. 그러나 장군은 그가 창안해 낸 새로운 전술들을 펼쳐 보이며, 차근차근 적들을 섬멸해 나갔다.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 )’라는 그의 친필 글귀처럼 장군은 늘 죽을 각오와 용기로 전쟁에 임했다.

     

    장군은 기존의 관념과 관례를 깨드리고, 조선 앞바다의 물 흐름에 맞는 창조적 전술을 개발하여 바다에서 전쟁을 해 보지 않은 조선의 군사들이 해전에 익숙한 섬나라 군사들을 무찔러 낼 수 있게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학이 날개를 펼친 듯이 진을 짜는 학익진(鶴翼陣)과 장사진을 통해 창조적 전술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동안 일자진(一字陣)에 길들여져 있던 전술에서 새롭게 창조한 학익진, 장사진은 지금도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길이 빛나고 있다. 이 학익진과 장사진은 수세와 공세를 겸할 수 있고, 적들을 유인해 내고 섬멸하기에 좋았으며, 도망을 가다가 역공을 펼치기에도 유익 했다. 포위가 되도 역포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장군은 ‘거북선’이라는 전선(戰船)을 만들고, 이를 전쟁에 투입하여 큰 전과를 올림으로써 그의 창조성, 창의성을 더 높이고 있다. 이 소설에 의하면 일본의 큰 배는 3층 누각을 설치했고, 단청을 사찰과 같이 했으며, 배 앞에 푸른 일산(日傘)을 세웠고, 누각에는 검은 비단 휘장을 드리웠다고 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은 적의 배가 수 백 척이라 해도 쉽게 돌진할 수 있게 되어 있고, 앞에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아 적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였고, 안에서는 밖을 내다 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 사람의 탁월한 창조적 전술과 불퇴전의 용기가 백척간두의 나라를 살리고, 기아와 빈곤, 불안과 절망에 빠져 있던 백성들을 구해내고 있음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그 주인공은 이순신 장군이며, 장군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옛 사실 속의 개인과 나라, 나라와 개인의 관계를 웅변처럼 말하고 있다.

     

    또 이 책은 기존의 방식이라는 두꺼운 껍질을 깨내고, 어제 하던 일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사물과 사건을 요모조모 살펴볼 수 있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인 면과 공적인 면을 자세히 묘사함으로써 우리들이 신성시해서 다가갈 수 없었던 장군의 모습을 친근하게 볼 수 있게 안내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나에게 이순신 장군처럼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 넣었고, 또 장군처럼 나라를 위해 ‘사즉생’의 용기를 갖추자고 다짐 할 수 있게 해주었다.

     

    (2008.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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