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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너머 새 세상을 꿈꾸며(2008실버문화학교 운영사례)카테고리 없음 2008. 12. 6. 16:36
(이 글은 12월 2일 부산 해운대 한화콘도에서 열린 워크숍에서 발표한 것이다)
문경문화원 실버문화학교 운영사례
1. 타의에 의한 출발
사무국의 우리는 새로운 사업이 떨어지면 겁부터 납니다. 새로운 사업이 온다고 해서 수당을 더 받는 것도 아니요, 봉급이 더 올라가는 것도 아닌데, 일만 더 늘어나고, 힘만 더 드니 너무도 당연한 인간의 속성이겠지요.
연합회 공모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있는 인력, 있는 시설이 있어야 공모할 수 있는 이런 사업은 정말 겁이 납니다.
그럼에도 이 사업에 응모한 것은 순전히 원장님께서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결과였습니다. 우리 원장님으로 말 할 것 같으면 건설업으로 생을 살아오신 전투적이고, 안되면 되게 하라는 기업가정신이 투철한 분이십니다. 일을 보면 하고 싶어 하는데다가, 하고 나면 성과가 있기를 기대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밑에서 일하는 우리들은 언제나 천근만근 되는 짐을 지고 있는 형국입니다. 각종 공모 안내문이 붙은 공문이 오게 되면 덜컥 겁이 납니다. 또 이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저는 많은 국장님들과 마찬가지로 2006년 7월 1일에 문화원에 첫발을 디딘 공채 1기입니다. 꿈도 많고, 하고 싶은 열정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차츰 일을 하면서 선배 직원의 푸념 같은 하소연들이 새로운 사업을 펼치는 것이나, 새로운 일들을 떠벌이게 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 아닌가 여겨지기 시작 했습니다. 2006년 ‘결혼이주여성문화체험’, ‘벽지학교 학생 문화체험프로그램’, 2007년 ‘실버문화학교’를 공모하여 진행해 본 결과 선배 직원의 하소연은 사실임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니 저도 차츰 꽤가 나기 시작했고, 그럴 무렵 ‘2008실버문화학교’사업이 공고되었습니다. 어쩌나 저쩌나 공문을 손에 쥐고 망설였습니다. 에이~ 모르겠다. 원장님이 시키는 대로 하자. 그렇게 마음먹고 원장님께 결재를 올렸습니다. 원장님의 결론은 자명했겠지요? 그래서 올해 사업은 억지로 원장님의 성화를 못 이겨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사업의 선정 - 문경새재아리랑
2007년 처음 ‘실버문화학교’공모에 어떤 프로그램으로 응모하느냐가 첫 번째 관건이었습니다. 짚풀공예가 인근 노인회관에서 한창 성과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TV에도 출연하고, 인근 문화원에서 이 프로그램을 채택하기도 하는 등 우선 눈에 보이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또 우리 문화원 3층에 있는 향토사연구소와 유림단체협의회 어른들을 중심으로 ‘문화해설사’양성을 해 보는 것은 어떨까를 고려하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채택한다면 수강생 모집의 용이하고, 지금 보이는 분들이 가진 자산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강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연합회가 목적하는 수익창출 프로그램으로 지속하기에는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수강생을 권유해서 모집하기는 둘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무료강좌의 경우, 그래서 수강생을 아름아름 권유해서 모집한 경우, 이 경우의 수강생들은 마치 문화원이 신세를 진 것처럼 유세하기 일쑤임을 일반 문화학교에서 경험하였기에 ‘뭐 내주고 뺨맞는 경우’가 되기에 십상일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우 또한 개강 초기에는 수강생들이 북적대도 강좌가 진행될수록 수강생이 줄고, 급기야는 흐지부지 되기가 십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불특정 다수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문경새재아리랑’이라는 잊어진 향토민요의 전수, 이를 배워 다시 다음 세대에게 전승해주는 것. 이것은 문화원의 일이기도 하고, 어른들의 일이기도 했습니다. 원장님도 저의 아이디어에 칭찬을 해 주셨고, 저는 그 칭찬 한마디에 수당이니, 월급이니 하는 것들을 잊고 부랴부랴 공모에 응모하게 되었습니다.
3. 문경새재아리랑의 의미 - 고개 너머 새 세상
저는 신바람이 났습니다. 프로그램이 선정되고, 문경새재아리랑을 공부하면서 응모서에 하나하나 기록해 나갔습니다. 지역에 살면서도, 그리고 문화원의 사무국장으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향토문화의 발굴과 전승을 한다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너무도 지역문화에 대해 깊이 아는 것이 없었음을 실감했습니다.
제 전공이 문학인데, 제가 아는 우리지역은 신경림 시인의 시‘새재’가 전부였습니다. 그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한양이라 오백릿길
찾아가는 황소떼
두루마기자락 허리에 찌른
터벅대는 소모리꾼,
저것이 문경새재
서러운 서른 굽이
박달나무 젖은 이슬
키 장수 체 장수 눈물일까
봄바람 타고 올라왔다
찬바람에 묻어 돌아가는
안동 영해 청상과수 한 맺힌 눈물일까
저 고개 넘으면
새 세상이 있다는데,
우리끼리 모여 사는
새 세상이 있다는데 (3장 7절 부분)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던가요? 프로그램 제목을 ‘문경새재아리랑-고개 너머 새 세상’이라고 정한 것은 제가 아는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뭔가 2% 부족한 것 같은 제목이었습니다. 아직도 이 느낌은 여전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실버문화학교 골격은 갖추어졌습니다. 세부사항은 이 골격에 살을 부치는 것이었으므로 어려울 것도 힘들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의 실버문화학교는 채택이 되었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모집의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4. 구름떼 같이 몰려든 수강생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원하는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 수강생을 모집하겠다는 처음의 구상에 따라 지역 언론매체에 광고를 냈습니다. 원장님은 수강생들이 신문보고 오겠느냐며 아는 대로 연락을 해보라는 둥, 사업의 성공을 위해 지역 언론에 광고 중에도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랬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예상하지 못했던 수강생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기일 안에 등록한 분들이 150명. 그야말로 대박이 났습니다.
그러나 60명 예상의 수강생으로 짜인 예산이 걱정이었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는 것조차 따져서 먹어야 할 형편이니 빤한 우리의 살림살이로서는 걱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치회 임원들과 협의하여 월 10,000원의 회비를 자체적으로 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반이 줄었습니다. 그러나 그 반은 알토란 그 자체였습니다. 뭔가 돈을 내고 해보겠다는 수강생들의 열의는 점점 높아갔습니다. 유료강좌와 무료강좌의 차이가 서서히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5. 효과가 높아지고, 사기가 충천해 지다.
사실 우리의 민요를 배운다는 것은 대단히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이었습니다. 깊이 공부를 하지 않고는 그 맛을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 회 한 회 배우긴 하는데, 진도가 더뎠습니다. 우리의 피 속에 흐르는 음악적 리듬인데도, 가요의 물결에 파묻힌 우리가락은 좀체 몸에 붙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을 파악한 저는 수업 시작 후 10분을 수강생들에게 이 공부의 필요성과 이 공부의 가치, 앞으로의 방향 등에 대해 설명하고, 우스개소리 한마디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옛날에 이 사회를 주름잡던 다양한 실버들이 이런 저만 나타나면 열광을 합니다. 세계에서 ‘문경새재아리랑’은 여러분들이 제일 잘한다고 할 때면 박수가 떠나갑니다. 이런 좋은 것을 여러분 후세에게 전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도 합니다. 이거 배워 가지고 공연 나가서 공연비 받고 돈벌이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면 좋아서 박수가 떠나갑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앞설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신명나서 일하는 사람을 이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수강생들은 이와 같이 신명이 났습니다. 그러니 올해 우리가 대상을 받은 것은 따 놓은 당상이 아니었겠습니까?
6. 문화원을 문화생산기지로 만들다.
2년 동안 우리 수강생들은 여섯 곡의 향토민요를 전수받았습니다. 20여 년 전에 녹음해 놓은 죽어있는 우리의 소리를 살아나게 한 것입니다. 이제 어디 가서든지 20~30분 동안 거뜬히 소리를 해냅니다. 이는 문화원이 살아 있다는 증거요, 문화원 본연의 임무에 부합하는 일입니다.
연합회의 ‘실버문화학교’는 그래서 아주 의미 있고, 중요한 프로젝트입니다. 노령화사회로 접어든 우리 사회에서 ‘경로당’으로 치부되었던 문화원이 노인 중심 문화 생산기지로 탈바꿈 하는데, 이 프로젝트는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7. 고개 너머 새 세상을 꿈꾸며
이제 우리 실버들은 이 나라의 복지‘수혜 대상’으로서 부담이 아니라, 복지 공급자로서 역할을 해가고자 합니다. 단순한 수혜가 아니라, 우리가 배운 것들을 이 사회에 제공하고 그 대가를 당당히 받는 책임자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동안 살아온 우리의 인생 고난을 유세하거나, 고루한 잔소리 거리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 속에 내재했던 해학과 슬기를 새로운 세대에게 전해주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모질게 살았지만, 그래서 우리 실버들의 인생이 ‘문경새재아리랑’같은 것이었지만, 다시 한 번 새 세상. 멋지게 살아 보렵니다.
문경새재아리랑 같은 실버들의 지난 삶
첫딸 강숙이는
품빨래하다 내에서 낳아
철들자 <오라잇! 차장>
눈 맞춘 게 운전사서방.
에미 맘 이때나 저때나
썩은 새끼로 매단 호박.
둘째 놈 방식이는
품보리방아 찧다 낳아
겨투성이로 자랐어도
병 없어 미쁘더니
그 이름 맹호부대 용사
에미 앞서 가야더냐.
남은 두세 아이도
부엌에서 놓고, 타작마당에서 낳고....
한평생 궂은 팔자
말술로도 누를 길 없어
문경새재
아리랑 구슬픈 가락에
그 날 해를 지운다오.
(김시종/문경새재아리랑)
※ 2년 간 전수받은 소리 목록
문경새재아리랑
모심기소리
방아소리
다듬이질,물레질
칭칭이소리
논매기소리
보리개떡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