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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점촌고등학교 1학년 6반 고유진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다. 시간의 쉼 없는 흐름은 어제 같이 유아이었던 나를 이렇게 훌쩍 크게 만들었다. 할매의 젖을 만지지 않으면 잠들지 못했던 날이 어제 같은데, 나는 지금 고등학교의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어른이 되었다.
시간은 참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나를 철들게 하였고, 집안을 이해하게 하였다. 부모님의 소중함도 알게 하였고, 나를 이렇게 키워주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시간은 할매의 정신을 앗아갔다.
우리 할매는 무쇠도 녹이는 삶의 연금술사였다. 할매는 못하는 게 없었다. 밭에서 온갖 곡식과 푸성귀들을 철철이 집으로 들이셨다. 한여름 뙤약볕에도 그을리지 않는 철갑을 두르고 계셨다. 두 살 터울의 우리 삼남매를 키우시면서, 우리를 업고, 안고, 걸리며 밭농사에 집안일을 하시는 철인이셨다. 오척단신인 것을 안 것은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부터다. 그 전에 우리 할매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슴 넓은 분이셨다.
그런 할매의 정신을 시간은 앗아갔다. 내가 성장한 것만큼 나에게 뇌수를 몰래 옮겨 주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할매는 나에게 그 이상도 하실 분이시기에 할매의 지금을 나는 그렇게 읽고 있다.
몇 년 전부터 할매는 느닷없이 한밤중에 아침이라 이야기하고, 밥을 짓는다 하시면서 전기코드를 꽂지 않고, 설거지를 하시면서 세제를 쓰지 않으셨다. 그런 할매에게 우리는 화를 냈다. 그럴 때마다 할매는 전과 같지 않게 화를 내시고, 심지어 욕까지 하셨다. 나와 언니는 그런 할매가 미워 같이 소리를 지르고 대들었다.
우리들의 온갖 투정에도 오냐, 오냐 하시면서 다 받아주시던 우리 할매였기에, 흐트러져 자는 우리들을 다독다독 이불을 덮어주고 요를 깔아주셨던 할매였기에, 우리 집 뿐만 아니라, 큰집과 고모네까지 갖은 밑반찬과 알곡들을 준비해 주셨던 할매였기에 우리는 너무나 변한 할매의 모습에 화가 났던 것이다.
시간이 앗아간 할매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아빠였다. 믿기 싫은 치매라고 하셨다. 치매(痴呆)란 아는 것(知)에 병(疒)이 들어 어린아이(呆)가 되는 것이라 아빠는 말씀하셨다. 그러니 할매를 할매로 생각하지 말고, 우리보다 더 어린 3~4세의 어린이라고 생각하여 대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게 말같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엄마 아빠도 할매와 씨름하는 것을 보면 그 사실은 더 명확해진다. 네 살 난 옆집 조카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지 못할 때가 잦아졌다. 나를 몰라보고, 엄마, 아빠까지 몰라 볼 때가 있었다.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 나는 고등학교를 왔고,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주말마다 집에 와 보면 할매는 정말 너무도 딴 사람이 되어 계셨다. 집안을 정리하신다고 잠시도 쉬지 않으셨는데, 집안은 오히려 수시밤탱이가 되어있기 일쑤였다. 우리가 빨아 말려놓은 옷은 언제 없어졌는지 할매가 너무 잘 갈무리 하셔서 못 찾는 것 같은 것이 그 예이다.
그런 어느 날 마침내 할매는 우리 곁을 떠나셨다. 요양원으로 모신 것이다. 나는 너무나 할매가 보고 싶었다. 가슴이 멍멍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집에 계시는 것이 좋았는데, 할매가 없는 집은 온통 텅 빈 것 같았다.
봄에 때 아닌 진눈개비가 오던 날, 집안에는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고 했다. 할매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엄마 아빠가 사방 허둥대고 찾았는데, 할매는 경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할매의 손에는 세 개의 우산이 들려져 있었다고 했다. 초등학교에 간 우리 삼남매가 진눈개비를 맞을까봐 마중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다고 했다. 그랬다. 할매의 시간은 정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의 우리 모습을 알지 못하는 대신, 당신의 품안에서 고물고물 거리던 우리 모습만 머물러 있는 것이다.
시간은 이렇게 사람에게 있어 정지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할매를 통해 알게 되었다. 90여년 긴 세월 속에, 일제와 전쟁과 수많은 정쟁들은 다 잊고, 할매에게 재롱 피우던 내 모습만 남아 있는 것이다. 시간은 이렇게 언제나 흐르는 것만이 아니었다.
출처 : 국현 문학방글쓴이 : 국현 원글보기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