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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문경 점촌(경북매일신문)카테고리 없음 2010. 7. 2. 16:50
6·25 전쟁 60돌 기념식에 초청장은 받지 않았지만 자진하여 참석했다.
6·25 기념식장은 억새밭이다. 은빛의 물결이 출렁인다. 몇년전부터 6·25 기념식에 꼭 참석했다. 다시 있어선 안될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 결코 잊어선 안될 뼈아픈 공산당의 침략 전쟁이 6·25 전쟁이다.
남들이 6·25를 너무 까마득하게 잊고 살기 때문에 나만이라도 뼈아픈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 6·25 기념식장을 꼭 찾는다.
6·25 기념식에 참석하면 애국가를 1절부터 4절까지 완창하여 좋다.
보통 사람들은 `6·25 노래`가사도 잘 모르지만, 6·25 기념식에선 `6·25 노래`를 꼭 불러 꺼져가는 나라사랑 마음에 불씨를 되살려 준다. 6·25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생인 철부지였다.
6·25가 일어나 무기한 휴교를 하게 되자 학교 안가도 된다는 해방감에 환호 했으니 얼마나 무지한 아이였던가. 피난을 미처 못가고 집에서 그냥 지내야 했다.
점촌은 인민군 치하에서 두 달을 참아야 했다.
그해(1950년) 7월 31일부터 9월 26일까지 약 두 달을 적치하에서 움추려야 했다.
하루도 안 빠지고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하루 두 시간 비행기 공습이 있었다.
6·25 나던 해 여름에는 비도 안 오고 계속 가뭄이 들어 하루도 비행기 폭격이 없는 날이 없었다. 비행기는 인민군과 민간을 구별하지 않고 사람이 나타나면 무조건 사격을 했다. 작전 개념상 적치하에 있는 사람은 무조건 적으로 간주해 사격했다. 얼마나 공습이 용한지 코딱지 만한 오두막에 꼭꼭 숨어 있는 인민군 소대본부까지 놓치지 않고 소이탄을 투하해 불바다를 만들었다. 그해 9월 26일 해뜨는 아침, 함창 영강둑을 걸어서 국군이 다시 진격해왔다. 대형태극기를 네 사람이 들고 그 뒤를 따라 국군이 행군종대로 강둑 양쪽으로 나눠 행군했다.
두 달만에 태극기를 다시 보니 반가워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나왔다. 국군 아저씨들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같이 거룩해 보여 절로 박수를 쳐댔다. 계속 국군이 승승장구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만 백만 중공군의 불법개입으로 전선은 다시 남하 후퇴를 계속했다. 1951년 1월 중순께에 국군 2사단이 점촌까지 후퇴해 우리집에도 국군소대본부가 방 한칸을 차지했다.
그때 우리 집엔 일흔 네 살의 늙은 할머니가 중병에 걸려 집에서 투병 요양을 하셨다.
소대본부가 있는 우리 집엔 윤상사 사모님이 살았다. 윤상사 사모님은 19세의 젊은 여학생으로 6·25 사변 북새통에 학교를 중퇴하고 전선의 철새가 되었다.
윤상사 사모님 김영자 아줌마는 서울말씨에 얼굴이 참 예뻤다. 보급받은 쇠고기 일부를 할머니 국 끓여 드리라고 하루도 안빠지고 나눠 주셨다. 전세가 호전돼 김영자 아줌마도 국군을 따라 북진을 했다. 예쁜 김 아줌마는 떠날 때 나에게 `학생, 공부 잘해요`하고 덕담을 남기고 떠나갔다. 그 뒤로 나태했던 나는 개과천선해 모범생이 되었다. 6·25 때문에 여학생이 학교를 못다니고 위안부가 된 경우도 있었지만 전쟁 때문에 깨달음을 얻고 망나니가 모범생이 되기도 했으니 전쟁은 필요악이라고 할까.
지금 생존해 계신다면 79세가 되었을 김영자 아줌마. 그 분은 대한민국의 한 많은 딸이요, 역사의 희생자다.
김영자 아줌마를 다시 만난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지금까지 생존해 계신다면 인정많은 분이라서 틀림없이 노후가 행복하시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