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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벼락공포증
    카테고리 없음 2010. 8. 30. 09:28

    벼락공포증

     

     

    시인  김시종


     내가 중·고등학교들 다니던 1950년대는 집이 게딱지 같이 낮고, 큰 건물이 거의 없던 시절이라 피뢰침시설이 거의 없어,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지면 마을의 나무나 집의 빨랫줄에 떨어져 벼락 맞아 죽는 사람이 종종 생겨서 천둥이 치면 벼락 맞을까봐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예로부터 죄를 지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했는데 번갯불이 번쩍거리고 천둥이 치면 중죄인이나 된 양 벼락 맞아 죽을까봐 겁이 나고 기를 펴지 못했다. 굳이 죄지은 것을 찾는다면 이 부자네 보리밭에서 복숭아 서리한 것이 몇 번 있었고, 예쁜 동급생 분이를 더러 곁눈질한 죄밖에 없는데 대역죄라도 범한 듯 벼락이 무서웠다. 여름철은 더위를 먹어서 겁나는 게 아니라 벼락 때문에 여름이 빨리 물러가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이유 없는 벼락공포증 때문에 소년시절이 덧없이 흘러갔지만 그래도 살아가면서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요사이 젊은이들과 어른은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고 제멋대로 산다. 하고 싶은 행동과 말을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발산하여 벼락공포에 질려 있던 지난 소년시절보다 지금 세상이 훨씬 더 무섭다.
     중학교 2학년 시절에 비 오는 날, 한길을 두고 들길 따라 하교하면서 내가 가지고 다니는 손바닥만한 헝겊 우산 밑에 세 친구가 함께 함빡 비에 젖었다. 세 친구가 들길로 귀가하면 무섭던 번갯불도 우정의 힘 때문인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같이 등교하고 함께 하교하던 세 친구는 중학교 시절을 마지막으로 사는 곳과 가는 길이 나누어졌다. 지금 세 학우 중 나만 현존할 뿐 두 친구는 세상길을 하직하고 말았다. 여름철엔 우리 집 마당 들마루에서 삼베 홑이불을 덮고, 옛날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여름밤만 샌 게 아니라 소년시절도 아쉽게 새고 말았다. 나는 겁이 많고, 다부지지 못한게 특징이다. 육군에서 34개월을 복무하면서 몽둥이질 당한 것이 도합 1000대를 웃돌지만 나는 부지깽이 가지고 하급자를 한대도 못 때리고 만기 제대했다. 철저한 적자 군대생활이었다.
     나는 천둥만 무서워한 게 아니라 고소공포증도 수준급이었다. 내가 살던 마을 부근에 있던 철교를 멀리서 바라만 봤을 뿐 철교 위를 성큼성큼 한번도 걷지 못했다. 철교높이는 10m 정도가 되고 철교길이는 30m 정도였다. 철교 밑으로는 수심이 제법인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명승지에 가서도 벼랑 가까이서 못보고 거리를 두고 안전하게 바라보았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멀미를 느끼게 되어 의식적으로 높은 곳을 피해 다니면서 살았다.

      직장 생활도 고소공포증의 여파로 혁혁한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적절한 위상을 견지하면서 정년퇴임을 맞았다. 올해 8월 말로 정년퇴직한지 꽉 채운 6년이 된다. 나는 소년 시절 때처럼 두려운 것이 많다.

      많은 국민들의 안보 불감증이 겁나고 청년실업사태가 무섭고, 애국심이 없는 매국노 수준의 정치가들의 두렵다. 일흔이 내일 모래면서도 사춘기 소년이상으로 미녀 앞에서 수줍다. 망녕 이라고 해도 좋고, 숫기라고 해도 수용한다. 남은 세월도 순수하게 무서워해야 할 것을 무서워하며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며 살되, 진리가 아닌 것은 아무리 강한 세력이라도 무서워하지 않으며 나의 진실을 보여주리라.

      나의 가치를 나의 존재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주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별은 자기등급만큼 알게 모르게 빛을 내는 것이다. 주위가 어두울수록 별은 더욱 밝게 빛난다. 내 존재가 눈부시지 못한 것은 아직 세상이 덜 어둡기 때문이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보다 사회가 더 밝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난날이나 지금이나 나의 존재가치는 두려움을 알고 겁낼 줄 아는 미덕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닐까 한다.

     

    (2010.8.27. 금요일. 경북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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