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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의 임진왜란 당시 모습 자료 나와 - 고상증의 성재집 출간카테고리 없음 2015. 3. 21. 22:19
문경의 임진왜란 당시 모습 자료 나와
흔하지 않는 자료 ‘성재집(省齋集)’으로 출간역사책에서만 보아오던 420년 전 임진왜란. 1592년부터 7년간 일본이 우리나라를 약탈하고, 분탕질했던 이야기들이 마치 남의 일처럼 와 닿지 않은, 공부만 해야 하는 지나간 이야기.
그런 임진왜란이 어려서는 이순신 장군을 알게 했고, 조금 더 자라서는 안동 출신인 서애 류성룡 선생과 학봉 김성일 선생을 알게 했을 뿐, 그래도 막연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당시 문경지역 선비가 의병을 일으키며 왜적들과 싸우면서 문경의 모습을 기록한 자료가 최근 문경시에서 ‘문경문화연구총서 제11집 ‘성재집(省齋集)’으로 출간돼 화제다.
이 책은 문경에서 600년을 세거하고 있는 개성고씨 양경공파 문중의 후손인 성재(省齋) 고상증(高尙曾. 1550~1627) 선생 문집이다.
그 중 용사실기(龍蛇實記)는 성재 선생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12일부터 1598년 12월12일까지 쓴 일기다. 전쟁을 관망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의병이 돼 전쟁을 하면서 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가 바다의 전쟁 기록이라면 성재 선생의 이 용사실기는 육지의 전쟁 기록이다.
그 중에서도 선생이 활동한 문경, 예천, 상주를 비롯한 대구, 경남 창녕, 현풍, 성주 등지의 상황, 문경의 선비들인 권의중, 황정간, 고상안, 고인계, 채득강, 최대립, 여춘 등과 창의한 내용, 곽재우 장군과의 연합작전 등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4월13일 이후, 12일 만에 이미 왜군들이 문경에 쳐들어 와 4월25일 ‘마침내 적군이 고을 경계를 침범하였다. 순변사 이일이 북천가에서 적을 맞아 싸웠으나 화살 하나도 쏘기 전에 전군이 패망하였다. 권길과 이일은 적진 속에서 죽었다. 적들은 성을 점령하고서 군대를 머무르게 하고는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여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니, 마을에는 시체가 즐비하여 형세가 그야말로 위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성재 선생은 그 이튿날 ‘황공직, 고선승, 김덕윤, 권의중, 권용중, 박사명, 채달원, 여춘 등 여러 벗들과 모여서 적을 막을 방법을 의논하였다. 활과 화살과 몽둥이를 많이 만들었으며, 능장(稜杖)은 세모지게 하였고, 화살은 여섯 냥으로 하였다. 또 석거(石車)를 산꼭대기에 설치하여 두고 뜻밖의 필요에 대비하였다. 적의 우두머리가 험하고 좁은 골짜기까지 모조리 수색하여, 사람만 만나면 죽이고, 집은 불을 지르며, 말이나 노새를 빼앗고, 소나 양을 때려 죽여서 왜적의 양식으로 삼아쓰니 예로부터 전쟁의 참혹함이 오늘보다 심한 적은 없었다.’며 창의내용도 기록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성재 선생은 현풍의 곽재우 장군을 찾아가 함께 의병활동을 논의하고, 임무를 받았으며, 지금의 사벌면 매호리, 풍양면 하풍, 점촌의 당교에 머무르다 신길원 현감이 순국하는 소식을 들으며 문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리석은 농민들이 왜적의 위력에 겁을 먹고는 얼굴을 들고 굽신거리며 위태로운 목숨을 구하고자 왜적의 명을 따랐다. 그 해로움이 저 왜놈들보다 심하니 이런 짓을 차마 한단 말인가.’라고 한탄했다.
전쟁 한 달 후쯤인 5월20일 성재 선생은 마을(현재 문경시 산양면 신전리) 뒷산인 ‘장자산(丈者山)에 올라서 멀리 함창과 은척 등지를 보니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찔렀다. 산골짜기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있으며 더러는 무리를 지어 도적이 되었다고 하니 듣고서 기가 막혔다. 즉시 편지를 써서 적을 방어할 여덟가지 조목을 언급하여 권 중위의 진중에 보냈다.’고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 책에는 이 용사실기 외에 선생의 시문도 번역돼 실렸다.문경매일신문 고성환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