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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우울증과 자살 충동 - 목사 김웅카테고리 없음 2016. 3. 24. 21:03
내가 격은 우울증과 자살 충동
김웅 목사
2015년의 봄은 내 인생에 가장 혹독한 봄이었다. 당시 느낌에 내 인생에 다시는 오늘 같은 봄날은 그림자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놀랍게 2016년의 봄은 왔고 나는 그 봄날을 누리고 있을 만큼 안정권에 들어섰다.
그날의 충격으로 신경과 입원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몸과 마음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몸에는 파킨슨병과 유사 증상이 나타나면서 손이 떨리고 허리를 펴지 못하고 걸음이 제대로 되지 않고 온 몸에 기운이 빠져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마음(정신)도 황폐화되어 갔다. 사람은 몸(육신, 신체)과 마음(정신)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몸이 병들거나 장애가 있어도 마음이 건강하면 극복하기가 쉽다. 반대로 마음이 병들거나 정신적 장애를 갖고 있어도 몸이 건강하면 이 또한 헤쳐 나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몸과 마음이 동시에 지치면 회복의 시간은 요원하다.
나는 양쪽을 다 잃었다. 양쪽을 다 잃으면 이중고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은 삼중고 이상을 겪게 된다. 이것이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모든 것은 지나고 나서야 안다. 지나고 보니 내가 격은 마음에 병은 심한 우울증, 대인 기피증, 공황장애 등이었다. 오늘은 우울증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작년 3월에 사건이 터졌다. 횡령이라는 죄명으로 피소를 당하고 대중 앞에서 사기꾼으로 매도당하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해명할 기회도 없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대립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우울증의 주된 원인은 상실감이다. 아이가 장난감을 잃어버리면 우울해진다. 가장 큰 상실감은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이다.
평생을 명예와 인간관계에 무게 중심을 두고 살아온 나는 그날 모든 것을 다 잃고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일이 쉽게 정리가 되지 않으면서 스트레스가 누적 되어갔다. 뒤돌아보면 그때부터 지난 늦가을까지 우울증이 가장 심했던 것 같다. 가족들 앞에서 입만 열면 ‘죽는다.’ ‘나 하나 죽으면 그만이지 뭐!’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오죽했으면 아내가 그 말을 받아 적었을까. 말만 그러는 게 아니라 머릿속은 온통 자살 생각뿐이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자신을 달래고 격려하고 야단을 쳐도 자살 충동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아흔이 넘으신 어머니가 대전에 사신다. 16층 아파트다. 맥없이 누워있는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신다. 옆에서 어머니는 기도하시는데 나는 벌떡 일어나서 뛰어내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길을 걷다가 차가 지나가면 그대로 넘어져서 차에 부딪혀 죽고 싶었고 아니면 차가 내 쪽으로 돌진해 주기를 바랐다. 텔레비전에서 사고나 혹은 테러로 몇 명이 죽었다는 뉴스에 귀가 번쩍 뜨이고 그렇게 한 순간에 죽어 간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을 때는 끊임없이 죽음의 방법을 생각했다. 그래도 목사이니까 자살까지는 그렇고 그래서 사고를 위장한 자살을 많이 생각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 번도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름 우울증에 대해 강의도하고 설교도 하고 우울증 환자를 상담도 적지 않게 했는데 말이다. 그래서 우울증은 병이고 병든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 결과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그런 나를 지켜보는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었으며 또 나를 아는 지인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래서 늘어져 있는 나를 보고 ‘힘내세요.’ ‘용기를 가지세요.’ ‘목사님이 좌절하시면 우리는 어쩌란 말입니까.’ 심하게는 ‘목사님 입에서 자살이라는 말이 어찌 나올 수 있습니까.’ 라며 야단을 친다.
신앙인들은 ‘목사님 기도 하세요.’ ‘목사님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세요.’ 등 수학 공식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뒤돌아보면 나도 그런 죄를 참 많이 저질렀다. ‘죽는다는 소리가 왜 나와 아직 살만하니까 그런 소리 하지.’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좋은 날 올 겁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려고 성도님을 시험하시는 거니까 인내하십시오.’
내가 당해 보니까 그런 말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도 힘내고 싶지만 나올 힘이 없는데 무슨 수로 힘을 내라는 말인가. 어디서 빌려 오기라도 하란 말인가. 아니면 힘을 주던가 말만 하지 말고……. 마치 넘어진 사람의 등에 올라타고서 빨리 일어나라고 다그치는 것 같아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은 힘들다고 했을 때 ‘많이 힘드시지요.’- 결코 힘내세요. 라는 말이 아니다.
울고 있을 때 말없이 다가와 손잡아 주면서 같이 울어 주는 것이다.- 절대 ‘그만 울고 파이팅합시다.’ 가 아니다.
이를 상담에서는 공감이라고 한다.
우울증 전 단계가 우울감이다. 우울감 단계에서는 자살 충동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자살하는 사람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자신의 마음이 힘들어지면 ‘아~ 사람이 이래서 자살하는구나. 누구나 자살을 생각할 수 있겠구나.’ 라며 자살자를 생각하는 것 같이 하면서 기실은 자신을 달랜다.
아직 내게는 몸과 마음에 상처가 있다. 당시와 비슷한 상황을 접하거나 그런 사람을 만나거나 혹은 그때 일이 떠오르면 몸과 마음이 불안하게 반응을 한다. 마음을 담대하게 가져도 몸이 먼저 반응을 하거나 컨디션이 좋아도 마음은 불안할 때가 있다.
그런데 한 가지는 분명히 치료가 되었다. 우울증이다. 지난겨울부터 자살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고 내 입에서 죽음이라는 말이 사라졌다. 특별히 치료를 받은 적이 없다. 언제부터 사라졌는지도 정확히 모른다. 생각해 보면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애써 감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다. ‘자살은 무슨 놈에 자살~’이 아니라 ‘죽고 싶을 만큼 힘 드신다는 말이군요.’ 이 한 마디가 우울증으로 얼어붙었던 마음 밭에 꽃을 피우는 봄 햇빛이 될 것이다.
우울증은 정말 무서웠다.
(동문교회 목사. 010-4159-8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