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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문경전투-제8부 아! 노루목 고개/채희영 전 경북도의원카테고리 없음 2021. 4. 10. 22:41
6.25와 문경전투-제8부 아! 노루목 고개
채희영 전 경북도의원
6.25동란이 발발하기 9개월 전인 1949년 9월 15일 23:00경 공비들이 경찰 경비전화선을 절단한 뒤 문경경찰서 동로지서를 습격하기 위해 접근하였다. 같은 시각에 동로지서 외각에서는 비무장으로 대한청년단 소속의 강덕수와 이윤재 등 2명이 평소 출몰이 예상되던 공비들을 경계하던 중 거동이 수상한 2명이 접근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을 향해 수하를 하자 공비들은 갑자기 사격을 가하여 청년단원 2명을 무조건 사살하였다.
공비들은 계속해서 동로지서를 향해 총격을 가하면서 지서를 탈취하기 위해 접근을 시도했다. 이때 동로지서에서는 경찰관과 경비원들이 바리케이트를 설치해 놓고 야간인데도 불구하고 총성이 울리는 방향을 향하여 집중사격을 가했다. 한동안 상호 교전이 있었는데 공비들은 동로지서의 완강한 저항과 빈틈없는 방어태세로 습격이 불가능함을 판단했는지 지서 습격을 중단하고 말았다.
동로지서 습격에 실패한 공비들은 도보로 행군하여 산북면 내화리 마을까지 내려와서 부락민들을 협박하고 두들겨 패는 등 갖은 만행을 자행하였다. 동리 주민 중 박찬효(사망)씨는 공비들에게 매를 맞고 상하의를 벗긴 채 팬티만 입고 천신만고 끝에 산북지서까지 찾아가 공비출현의 신고를 한 책임 있는 유일한 부락민이다. 당시 공비들은 노루목고개에서 전진배치를 마친 다음 공격의 완벽한 태세를 갖추고 경찰 경비전화선을 절단하여 공비들이 소지한 전화기에 선을 연결한 다음 문경경찰서에 전화통화를 하여 동로지서가 공비들에게 습격을 당하고 있으니 긴급지원을 요청한다는 속임수를 통하여 경찰병력을 출동하게 한 다음 내화리 부락민들을 노루목고개 남쪽 기슭에 배치하여 경찰의 지원차량이 접근하면 수신호로서 공비들에게 알리도록 지시하여 놓고 생명에 위협을 느끼게끔 협박하였다.
공비들은 모든 조치가 끝난 다음 은폐물을 의지하고 또는 석굴 등에 잠복하여 경찰의 지원차량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러한 상황을 전연 눈치 채지 못한 경찰지원 차량은 선두차량에 이무옥 문경경찰서장과 경찰간부들을 태우고 서서히 동로지서를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은성광업소에서 차출한 트럭에 경찰병력을 싣고 비포장도로를 따라 접근하였다.
경찰은 노루목고개에 전투 배치된 공비들의 계획에 대한 정보도 없이 고개 마루에서 어슬렁거리는 내화리 주민들을 산북지서에서 공비출현으로 인한 산악수색을 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아무런 경계심이나 대응방어책도 없이 전진을 하고 있었다. 싸리나무 등을 꺾어서 위장한 공비들에게 예견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당하고 말았다. 공비들은 경찰병력을 탑승시킨 차량이 접근하자 M-1소총 등으로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공격하니 경찰차량에서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고 이무옥 서장과 민재홍 동로면장을 비롯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때가 1949년 9월 16일 07:00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이무옥 경찰서장은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공비들을 향하여 1발을 발사하고 공선덕 순경의 칼빈 소총을 넘겨받아 발사하려는 순간 적탄을 맞고 순직한 안타까운 희생이 발생했다. 뒤따라오던 트럭에 탑승한 경찰관들이 뛰어내려 지형지물을 이용한 반격태세에 돌입했으나 공비들은 약 10분 동안 집중사격을 가하여 경찰들을 꼼짝 못하게 묶어놓고 있을 때 앞쪽 산에 은신하여 있던 주민들이 바위틈에 몸을 숨긴 채 응사의 기회만 노리고 있는 경찰관들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바위틈에 개새끼들이 많이 숨어 있으니 총을 쏴라”고 고함을 지르는 모습은 후일 부락에 크나큰 불행의 화근을 가져왔다.
그들은 대다수 보도연맹원으로 처형되어 동리가 그야말로 쑥밭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9월 16일에는 40여 가구가 한날한시에 제사를 모신다고 하니 얼마나 아픈 상처인가. 산북면 내화리의 비극이 바로 노루목고개 사건에서 태동되었음은 지금도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찰들은 위기를 맞이하여 죽기만을 기다리는 다른 방법이 없었는데 때마침 공비들은 “손을 들고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경찰들이 손을 들고 나가지 않으니 공비들은 빈 깡통에 모래를 넣고 다이나마이트에 뇌관을 꽂은 사제 수류탄을 바위 밑으로 던져 넣었다. 이 때문에 경찰들이 혼란에 빠져 갈팡질팡하는 바람에 총탄에 맞아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한편 공비들은 “경찰관들 속에 민간인 의사가 있는 줄 알고 있으니 손을 들고 나오면 살려준다.”고 외쳤다. 이는 이원영씨를 지목하여 한 외침이었다. 경찰은 출동 전 점촌동 점촌의원을 경영하던 의사 장원극씨를 동행하려 했으나 때마침 부재중이라서 산북에서 거주하는 이원영씨가 은성광업소 병원에 근무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출동 중 현지에서 차출하였던 것이다. 이원영씨는 생존 시에 부인에게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당시 상황을 “의사는 손을 들고 나오면 살려주겠다는 공비들의 고함에 엎드려 있던 누군가가 자기를 의사조수라고 공비들에게 말 좀 해달라고 하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원영씨는 1910년생으로 당시 39세였다고 문경시청 민방위과장으로 재직하다가 사망한 고인의 아들인 이규환씨는 증언하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나온 이원영씨는 공비 중 한 명이 대한석탄공사 은성광업소에서 운영하던 병원에 함께 근무하던 사람으로서 이원영씨를 알아보고 말했을 것이라고 술회한 적도 있다고 했다.
당시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종기 경사는 계급장과 신분증을 폐기한 다음 손을 들고 공비들에게 투항하는 촌극도 있었다고 한다. 생존 경찰관들은 손을 들고 개울 건너편에 모여 있었는데 33명의 공비가 위장을 한 채 앞에 총 자세로 산에서 내려오는데 공비의 소대장이라는 자는 사망한 이무옥 경찰서장의 헬멧을 쓰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경찰 정모를 쓰고 있기도 했다.
여타 다른 공비들은 사망한 경찰관들의 손목시계와 소지품을 뒤적이느라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손을 들고 서 있는 경찰관들의 손목시계도 벗겨가고 총기와 실탄도 모두 탈취해 갔다. 노획품을 정리하던 공비 소대장은 “진작 손을 들었으면 험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자기들은 사람을 죽이려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고 나라를 찾기 위해 밤이슬을 맞아가며 산으로 다니는 사람이다”라고 했으며, “나라를 찾기 위하여 당분간 여러분의 소지품을 회수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공비들은 생존 경찰관을 향하여 경찰복을 벗어라고 위협하여 맨발에 팬티, 런닝셔츠만 입고 있었는데 소대장이란 자가 민간인, 순경, 경사, 경위 등 구분하여 모이라고 하였으나 경사, 경위는 모두 앞차에서 죽었다고 말하니 전리품을 빨리 정리하라고 호통을 치는 모습이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인연이란 것인지 기적의 순간과도 같이 공비중의 한 명이 조정기 순경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 자는 조정기 순경과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고향동료였다. 그자는 국군에 입대한지 1년 정도 되었는데 공비가 되어 노루목고개에서 만났으니 사람의 삶과 인연이란 기묘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할 것이다. 공비들은 대한석탄공사 은성광업소의 운전원이던 안윤석에게 트럭을 운전하게 하여 동로를 향해 이동하던 중 수평양조장 부근에 이르렀을 때 휘발유통이 총에 맞아 기름 부족으로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했더니 트럭을 불태운 뒤 양조장 뒷산을 타고 도망쳐 사라졌다.
안윤석 운전기사의 기지로 조정기 순경과 함께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하여 특기할 사항은 당시 동로면장으로 재직하던 민재홍씨가 문경군청 회의에 참석하려고 전일 흥덕동에 있는 여인숙에서 투숙한 뒤 아침에 사건을 접하고 군청의 읍면장 회의를 포기한 채 경찰출동 차량에 동승하여 동로를 향해 가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비포장에 정기적으로 다니는 버스도 없어 점촌에 나와서 하루를 자야만 군청회의에 참석했다고 하니 민재홍 면장의 동로면을 위한 책임감이 돋보이고 공직자로서 애국 애민하는 고귀한 정신이 화를 자초한 것이었다.
문경시청에 근무했던 최경관 국장의 실형인 최경현씨는 당시 문경경찰서 경무반 차석이었는데 출동명령을 받고 전투복을 바꾸어 입으려고 집에 들렸다가 집결지인 경찰서에 도착해 보니 이미 출동차량이 출발한 뒤여서 화를 면하기도 했다고 한다. 최경현씨는 뒷수습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하니 생존자와 죽은 자의 차이란 천당과 지옥의 차이만큼이나 크다고 할 것이다. 당시 경찰관으로 출동에 참가했던 점촌의 중앙동에 거주하는 김상태씨는 어깨에 부상을 입었으며, 산양면 불암우체국장으로 사설우체국을 경영하고 있는 김재도씨는 발목에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생존부상자들은 김천에 있는 회생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순직경찰관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넋이라도 달래듯 소낙비가 쏟아지는 날씨 속에서 시신수습을 위한 비상이 걸려 운구절차에 들어갔다. 경찰관 시신 12구, 민간인 3구, 모두 15구의 시신을 흰 광목천으로 싸서 문경경찰서 연무장에 안치한 다음 경북경찰국장이던 조재천 국장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합동위령제를 올림으로서 넋을 달래기도 했다. 위령제가 끝난 다음 경찰특공대는 1개월 동안 공비소탕작전을 전개하여 90%이상 사살 또는 생포하기도 했다. 빼앗겼던 무기도 거의 회수한 상태였다.
특공대의 소탕작전 중 생포된 3명의 공비는 점촌장날을 맞아 임축 근방의 논바닥에 세워진 나무기둥에 묶인 채 장꾼들이 구경을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어 모인 가운데 880부대원들의 사격으로 공개처형 되기도 했다. 이러한 6.25전쟁 전 발발한 사건이 그 당시 사회의 혼란상과 좌우익의 사상 충돌이 얼마나 참혹한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오늘의 젊은이들은 이해하기 곤란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 필자의 뇌리를 짓누르는 하나의 고민은 현재의 노루목고개에 세워져 있는 경찰전공비의 문제다. 원래의 순직경찰관기념비는 현재의 위치에서 북으로 130m 정도 내려가서 길가의 경사지에 있었다. 그곳이 바로 사건당시의 접전장소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사건을 정리하면서 빈약한 자료와 생존자들의 증언을 종합하여 흘러간 한 순간의 역사를 정리하기엔 한계를 느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의 경찰전공비의 문제는 재조명이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어진다.
현 위치의 전공비가 원래대로 순직경찰기념비가 되든지 아니면 위령비가 되든지 말이다. 일방적으로 기습을 당하여 사망자가 발생하고 무장해제를 당한 상황으로 볼 때 전공이라 함은 너무 과장된 역사의 오류라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역사는 진실 되게 사실을 전함으로서 후세에 교훈이 되기 때문이다. 그날의 크나큰 아픔을 생각한다면 쓰라린 가슴이 될지라도 사실을 사실대로 정리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6.25동란 직전 혼란한 시기를 틈타 발생한 피맺힌 원한의 노루목고개 사건은 이제 역사 속에 묻히고 다듬어 포장된 고갯마루에는 그날을 잊어선 안 된다는 굳은 교훈을 전하려는 경찰전공비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늘 높고 말이 살찐다는 가을을 맞아 그날의 원혼들이 하늘을 맴돌고 있으련만 그들 원혼들이 피를 토하는 절규 속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의 허욕에 찬 공명심이 전공비라는 어처구니없는 허명이 진실을 감추고 있다. 원혼들이 맴돌고 있는 이곳 경찰전공비는 다행히 늦은 감은 있으나 국가보훈처의 도움으로 현충시설로 2003년 2월 지정받아 관리 운영비 등을 국가로부터 수령하여 관리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하겠다. 아! 노루목 고개여! 잠든 혼련들이여 영면하소서! 하늘이여! 조국이여! 이들을 보살피소서!
경찰전공비
1) 장소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 속칭 노루목고개(점촌 기점 18㎞)
2) 순직개요
1949. 9 . 16 미명을 기하여 동로지서가 공비의 습격으로 포위당하여 전멸상태에 있다는 연락을 접하고 당시 서장 경감 이무옥외 27명이 출동 중 경찰서에서 18㎞ 상거한 산북면 내화리 소재 노루목고개에 이르자 동 지점에 잠복 중이던 공비들로부터 기습을 받아 교전하다가 경찰서장외 14명이 전사함.
3) 전공비 연혁
1954. 12. 25 문경군민의 이름으로 순직 경찰관 기념비 건립
1977. 6. 6 문경경찰서장 총경 이덕윤이 비석을 고쳐 세움
1981. 8. 2 국비 1,800만원, 지방비 500만원, 계 2,300만원으로 현위치에 탑신 및 조경공사 완공
1987. 8. 2 탑신 전면 우측축대 길이 13m, 폭 7m 폭우붕괴로 지방비 400만원으로 복구
1992. 7. 12 전공비 부지 1,478㎡, 지방비 500만원 군수명의로 구입 등기
1992. 9. 16 경우회 문경시지회 부회장 윤오욱이 자비 300만원으로 비문,제단,계단 등 정화
※ 매년 9월 16일 추념제
4) 시설제원
면적 : 430평, 탑신높이 : 5.7m, 기단높이 : 4.5m
건립취지 : 경찰전공비는 1949년 9월 16일 아침 동로지서를 습격한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출동 중 적과 교전타가 당시 문경경찰서장 이무옥외 14명이 적의 흉탄에 장열하게 산화한 전적지로써 애석하게 가신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경찰전공비 건립.
작가 및 연락처, 작품설명 : 작가 및 연락처 작품설명은 자료가 없어 불상
비문내용 : 이 전적지는 1949년 9월 16일 아침 문경경찰서를 습격한 공비를 섬멸하기 위하여 서장 외 19명이 출동 중 이곳에서 적을 만나 교전하다가 서장 총경 이무옥 외 11명의 경찰관과 동반한 당시 동로면장 민재홍 외 민간인 2명이 전사하고 김상태 외 3명의 경찰관이 부상한 전적지이다.
5)순직경찰관
경감 이무옥(서장), 경위 김한원, 경위 김호준, 경사 임학구, 경사 안영직, 순경 강해원, 순경 김경석, 순경 이정호, 순경 공성덕, 순경 백두인, 순경 박운주, 순경 조건우, 동로면장 민재홍, 민보단 강덕수, 민보단 이윤재
6) 참전생존자
김재도(77세, 남, 산양면 불암리 12-5, 553-4006),
김상태(74, 남, 점촌동 188-1, 555-2187)
7) 유족명단
<순직자> <유족>
경감 이무옥 자 이범륜(경기 고양 일산 주엽2동 문촌마을 403/1304호
경위 김한원 자 김근원(불상)
경위 김호준 불상(불상)
경사 임학구 불상(불상)
경사 안영직 불상(불상)
순경 강해원 강길성(불상)
순경 김경석 자 불상(불상)
순경 이정호 처 조순단(불상)
순경 공성덕 불상(불상)
순경 백두인 처 임촌연(불상)
순경 박운주 제 박운상(모전동 329번지)
순경 조건우 불상(불상)
동로면장 민재홍 자 민병하(동로 노은 188)
민보단 강덕수 불상(불상)
민보단 이윤재 자 이규섭(불상)
※ 비문 내용 중 이무옥 서장이 총경으로 표기된 것은 당시 문경경찰서장은 계급이 경감이었으나 노루목고개에서 전사함으로써 총경으로 추서되었기 때문이다.